‘방송 패널 선정 항의’ 정진석의 ‘심기 경호’

by 성기노
247180_246377_5550.jpg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실내 마스크 의무 해제 당정협의회에서 발언 뒤 마이크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민의힘이 지난 22일 방송사 11곳에 “시사 보도 프로그램 패널 구성의 공정성에 만전을 기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통령에 대해 비아냥대로 여당을 욕하는 사람이 어떻게 보수를 자처하느냐”며 여당에 ‘비우호적’인 일부 방송 패널들을 ‘보수 참칭 패널’, ‘자칭 보수 패널’이라고 비난했다. 여당의 ‘대표’가 방송에 나오는 패널들의 해설과 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방송사에 ‘항의 공문’을 보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22일 오전 본인의 페이스북과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연이어 “방송사들은 진보-보수 패널의 균형을 맞췄다고 강변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며) 이런 상황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100 대 0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라고 공세를 펼쳤다. 또한 정 비대위원장은 “(공문 발송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우리 당의 최소한의 요구”라는 주장하며 각 방송사에 항의 공문을 보낼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실제로 ‘패널 구성시 공정성 준수 요청의 건’이라는 항의 공문을 보내는 코미디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 위원장이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점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패널 선정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언론에 대한 ‘외압’이 될 수도 있다. 법적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 위원장의 패널 구성 문제점 지적에 대해 ‘누구든 방송 편성에 관해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떠한 규제나 간섭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방송법 4조 2항 위반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 시절 이정현 전 홍보수석이 KBS 고위간부에 전화를 걸어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에 대해 항의성 ‘지침’과 ‘협조’를 요구했다가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권력이 언론의 보도 자율성을 침해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국민의힘 측은 “방송법 6조에 ‘방송은 의견이 다른 집단에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고 주장한다. 방송법상 규정된 공정성과 정치적 균형을 지켜 달라는 정 위원장의 요청은 정당한 것이고 방송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정 위원장의 항의성 공문 발송이 이정현 전 홍보수석의 경우처럼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개입’은 아니더라도 방송사와 패널 입장에서는 충분히 ‘위압감’을 느낄 만한 사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뉴욕 비속어 발언 논란에 대해 상당한 피해의식을 느끼는지 일부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과 적대감을 거두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도 언론을 공정과 객관성을 가장한 ‘권력 길들이기’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어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다. 이렇게 여권에서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언론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급기야 집권 여당의 ‘대표’가 방송사 선정 패널에 항의하는 공문을 발송하는 사태로까지 발전된 것이다.


국민의힘 내부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친윤계(친 윤석열) 의원들은 정 위원장의 발언에 대체로 공감을 하는 편이다. 편향성이 뚜렷한 패널들을 내세워 의도적으로 국민의힘을 깎아내리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친윤계의 기류를 언론 객관성 비판을 가장한 정적 압박과 편 가르기라는 시각도 나온다. 정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비판한 ‘편향성 있는 패널’ 가운데 대표적인 인사가 바로 장성철 공론센터소장이다. 그는 최근 활발한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데 “김무성 전 대표 보좌관 출신으로 윤석열 대통령과 친윤계를 ‘모두까기’ 하고 있다”는 친윤계의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에 ‘조금박해’가 있다면 국민의힘에는 ‘유리천장’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금박해’는 20대 국회에서 활동했던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 중 비주류로서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로 부각된 조응천(남양주시 갑), 금태섭(강서구 갑), 박용진(강북구 을), 김해영(부산 연제구) 4인을 일컫는 용어다. 21대 국회에서는 조응천, 박용진 의원만 원내에 있고 김해영 전 의원은 부산으로 낙향한 뒤 원외에서 ‘이재명 저격수’ 역할을 하고 있고, 금태섭 전 의원은 아예 민주당을 탈당했다.

국민의힘 ‘유리천장’은 ‘유승민 이준석 천하람 장성철’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윤석열 대통령에 대립각을 세우거나 비판적인 인사들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현재 국민의힘에서 가장 저돌적인 ‘윤석열 저격수’로 통하며 이준석 전 대표는 ‘윤핵관’에 의해 토사구팽 되었다. 천하람 변호사는 순천당협위원장으로 대표적인 ‘친 이준석’계 인사다. 장성철 소장도 ‘친 김무성’계로 윤 대통령과 윤핵관을 항상 비판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민주당의 ‘조금박해’가 이재명 대표를 위시한 주류에 의해 ‘반대파’로 분류돼 배척당하는 것처럼 국민의힘에서도 윤핵관을 중심으로 한 주류들이 비주류인 ‘유리천장’을 정적으로 몰아세워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247180_246378_5711.jpg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미래 과학자와의 대화'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과거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에는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이라는 소장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비주류 소장의원들로서 개혁 성향이 강하고 소신 발언을 해 당의 쇄신을 이끌었다. 당내 대표적인 강성이었던 최병렬 전 대표는 소장파들을 지도부에 편입시켜 계파의 획일성을 배격하고 권력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실험’을 했다. 당시 소장파에 대한 당내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소중한 자산’이라며 그들의 목소리를 적극 수용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현재 윤석열 대통령의 ‘당심 100% 반영’ 의지와 정진석 위원장의 ‘보수 참칭 패널 교체 요구’ 등의 노골적인 ‘우경화’ 기류는 수직적인 명령체계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권력 운용 행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 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진석 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잉 충성을 하는 것 같다. 권력이 오만해지는 징후 중의 하나가 언론이 못마땅하게 보이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때도 언론의 편향성에 불만이 있기는 했지만 공문을 보내는 등의 오버는 하지 않았다. 언론을 이기려 하는 권력만큼 오만하고 못난 정권도 없다. 윤 대통령이 일부 언론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수 차례 지적하자 대통령실은 이미 강경 대응에 나섰는데 이제는 여당 비대위원장까지 나서서 대통령 눈치 보기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더라도 언론이 ‘예 알겠습니다’ 하느냐. 정 위원장이 언론의 반발과 국민의 비판적인 시각을 모르겠느냐. 그걸 알면서도 오로지 윤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개적인 아부 멘트를 날린 것인데 결과적으로 대통령과 당을 욕보이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여권 고위 인사들의 ‘받들어 총’ 기류는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특히 정진석 위원장이 여당 내에서 윤 대통령의 호위무사 역할을 자처하며 당의 ‘대통령 절대복종’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기자 출신인 정 위원장은 평소 직설적이고 과격한 언어로 ‘설화’를 자주 일으키는데 5선 의원으로 당내 ‘군기반장’ 역할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릴 만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고 의원들을 강력하게 틀어쥐고 있는 선을 넘어 이제는 방송사 패널 선정 문제까지 개입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극적 종말을 이끈 장본인 가운데 한 명이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심기 경호로 대표되는 차 실장의 극단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은 결국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단초가 됐다. 그는 대통령의 기분이 어떠한가를 경호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고, 조금이라도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보고서나 소신 있는 인사의 접근은 철저하게 차단시켰다. 혹여 윤석열 대통령이 방송사 시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보수 참칭 패널’의 ‘까는 말’을 들을까 봐 정진석 위원장이 ‘심기 경호’를 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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