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한국과 일본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그 발화점은 지난 2018년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이었습니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제강점기 피해보상은 끝났는데 무슨 소리냐’며 극렬하게 반발했습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 등으로 한국과의 외교채널을 사실상 ‘셧다운’ 하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이에 한국도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를 선언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해 제소를 하는 등 강대강으로 맞섰습니다.
그렇게 한일 관계는 2018년 이후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사실상 중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 존중과 피해자 우선주의, 여전한 반일주의 여론 등을 의식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결국 이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이 전 정권으로부터 인수인계 받은 고난도 외교 골칫거리가 돼 버렸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강력한 한미외교동맹을 재건하기 위해 한일관계의 점진적 관계개선을 제1교두보로 삼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강력한 ‘한미일’ 안보동맹 틀을 화룡정점하기 위해서 그 최대난관인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된’ 이유와도 맥이 닿아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내놓은 ‘해법’을 무조건 반일감정만 앞세워 거부하거나 ‘묻지마 반대’를 하기보다 정권교체라는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볼 필요도 있습니다.
특히 강제징용 판결로 한일관계가 끝을 알 수 없는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다 피해자들도 고령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마냥 국민정서와 여론 눈치만 보면서 ‘악성종양’ 치료를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일부 야권에서는 이번에 박진 외교부장관이 발표한 ‘제3자 변제’ 방법을 고육지책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재계에서는 일단 ‘경제적으로 이익’이라며 환영 입장입니다. “한국이 이제 힘 있는 국가 반열로 올라섰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에 과감하게 양보하고 좀 더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과 외교명분을 쌓을 수 있다”는 실리론도 나옵니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에 내놓은 강제징용 문제 해법을 바라보는 여론은 대체로 싸늘하고 비판적입니다. 먼저 용산 대통령실의 정무적 홍보기능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윤 대통령과 외교부는 그동안 이 문제를 쉬쉬 하며 여론의 ‘저항’을 억누르고 있다가 이번에 전격적으로, 일방적으로 발표를 해버렸습니다. 정부가 이번에 내놓은 해법을 보면, 그것을 미리 공개해 여론의 간을 보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해결책이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정부의 ‘한일관계 복원’ 비장의 카드는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배상은 행정안전부 산하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이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법원 판결에 따른 배상금과 이자를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배상에 필요한 돈은 우리나라 기업이 ‘자발적으로’ 갹출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대법원이 내린 ‘강제동원 일본 기업의 직접적 배상 판결’에 반하는 ‘초헌법적인’ 발상입니다.
두 번째는 사과 문제입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일제강점기 때의 피해보상은 물론 사과문제도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1965년 이후부터 끈질기게 견지하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도 1965년 이후 사과문제나 강제징용 피해 문제가 나올 때마다 ‘한국은 이미 1965년 우리에게 매달려서 돈도 받아가고 피해와 사과 문제를 끝냈는데 왜 이제 와서 딴 마음이 들어 시비를 거느냐’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놓은 사과 문제 해법도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정서’를 먼저 감안한 것 같습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표했던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잘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받는’ 것으로 갈음해버렸습니다. 일본은 이번에 대승적 차원에서 사과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대 내각 입장을 계승하겠다는 말 속에는 ‘추가 사죄는 불가하다’는 2015년 아베 담화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렸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윤 대통령이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통절한 반일감정이 턱 버티고 있는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지지율이 0%가 되더라도 결자해지 하겠다는 그 진정성과 의욕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윤석열 정권의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을 억지로 받아 들 수는 없습니다.
이번 강제징용 문제 해결 과정에서 야권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일본 총리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처럼 저자세와 굴욕으로 일관하다 외교적으로 완패했다”고 강하게 반발합니다. “일본한테 얻어낸 게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누굴 위한 해결이냐”며 분노를 표하는 국민들도 많습니다. 양금덕 할머니 등 생존한 피해자 3명 모두 이번 해법에 대해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정치적 명분도 이미 퇴색해 버렸습니다.
이번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은 크게 3가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먼저 윤 대통령이 야심차게 내놓은, 윤석열 정권 외교정책의 근간이 될 이번 해법이 과연 우리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은 “지금 북핵 위협과 중국 패권주의로 한 미 일, 한일 간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라는 외교안보적 명분을 내세웁니다. 일본을 유사시 우리의 ‘안보 방패’로 내세우기 위해서는 강제징용 문제를 어느 정도 손해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일 관계가 여전히 협력과 신뢰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쟁과 시기의 ‘잠재적 적’이라는 인식이 양국 국민감정 기저에 깔린 상황에서 유사시 일본이 한국의 안보를 위해 젊은이들에게 피를 흘리게 할 아량과 포용력이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일본은 ‘섬나라 고립공포증 DNA’가 내재된 민족입니다. 일본은 본능적으로 자국 이기주의가 발동하는 국가입니다.
자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거나 피해를 입을 조짐(석유 등의 자원 고갈)이 보이면 이웃나라 침략(태평양 전쟁)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국가입니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이려 하지만 우리의 의도만큼 일본이 협조적일지 미지수입니다. 오히려 한미동맹을 위해 일본에 너무 많은 국익을 내주는 것이 아니냐는 실리적인 계산을 해볼 때입니다.
두 번째는 강제징용 문제 해법의 추진에 대한 정책의 투명성입니다. 야권에서는 “도대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윤 대통령의 개인적인 욕심과 외교성과 집착증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 대해 “정부의 대일 저자세와 굴종을 지켜보면 이 정권이 어느 나라 이익을 우선하는지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천공이 시키더냐’라는 세간 비판까지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원칙은 맞지만 그것이 ‘특정인물’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무리하게 추진된다는 의혹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야권 일각에서는 “‘한국과 일본은 무조건 잘 지내야 한다’는 ‘망령’에 윤 대통령이 경도돼 국익과 명분, 국민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무리하게 강제징용 문제를 ‘결단’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런 의혹에 대해서도 ‘희뿌연 안개’를 걷어내야 합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해법에 대한 정책수립 과정과 그것이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등을 상세하게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너무 외교 성과주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야심차게 제시한 해법은 대체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진영 간 갈등으로 비화돼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만 더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본인이 ‘전부’ 처리하겠다는 ‘백마 타고 온 초인’의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다음 정권을 위해 다리 정도만 놓겠다는 헌신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한일관계는 윤 대통령의 ‘외로운 결단’으로 일사천리 처리하기에는 아직도 식민지 피해의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들의 어깨 위에 넓고 깊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