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한 중년 남성이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대기업 부장이 아닌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드라마 홈페이지)를 그렸다.
채널을 돌리다 가족들과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는 충격 그 이상이었다. 비슷한 연배에 1차로 감정이입이 됐고,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서늘하고 현실적인 묘사에 2차 감정의 전이가 졸린 뇌를 때렸다. 가족들과 1편을 보다가 자리를 떴다.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는 중년 ‘아저씨’들의 직장생활 고군 분투기에 ‘꼭 내 이야기같다’라고 말을 하는 동료나 선후배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떤 대기업 부장은 ‘그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면서, 그보다 더 한 일도 많다는 넋두리를 전했다.
그렇게 ‘서울 자가 김 부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닐 때쯤, 갑작스런 대학동기 부인의 죽음에 황망한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고 생각해 마음의 위로를 전하러 갔다. 오랜 만에 반가운 친구 A도 만났다.
그 친구는 한 대기업에서만 30년을 다녔다. 산을 좋아하고 친구들 모임에서도 사진 찍어주기를 좋아하는 착한 친구. 해맑게 웃을 때 초승달 모양으로 변하는 그 ‘예쁜’ 눈 모양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가곤 했다.
그와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울 자가 김 부장’으로 옮아갔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회사가 다른 대기업으로 인수돼 지금은 완전히 더 잘 나가는 부장이 됐지만 이제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 또한 김 부장 드라마를 보면서 마주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장면들 때문에 힘들었음도 고백했다. 우리 비슷한 또래라면, 오랫동안 직장을 다닌 사람이라면 그 드라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우리 둘은 흔쾌히 공감을 하며 또 소주를 들이켰다.
친구 A가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박탈감은 자신의 경험담에서 나오는 것이라 나는 더 절절한 공감을 그에게 보여주려 애썼다. 그 친구는 잘 다니던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대기업으로 넘어갔을 때 적잖이 동요했지만, 그래도 묵묵하게 그곳을 다녔다고 한다.
친구 A는 회사 인수 전 일정 기간 동안 무급출근을 했을 때 급여가 나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8시쯤 퇴근을 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고 고백했다. 과거에는 동료들이 모두 10시쯤 퇴근을 했는데 무급출근이라 그나마 8시로 앞당긴 퇴근시간에도 ‘죄책감’이 들었다는 그 고백은, 회사를 열심히 다니지 않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토록 회사를 사랑하는 ‘김 부장’들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았다고 생각하니 ‘서울 자가 김 부장’의 드라마적 고통이 더 현실적 아픔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예전에 한 친척 임원 출신은 “대기업 임원의 절반 가까이가 퇴직 후 우울증에 걸린다”고 말했을 때 속으로 과한 엄살이라고 생각했지만 드라마 ‘김 부장’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슨 황이 ‘한국 치킨이 세계 최고’라고 추켜세웠던 한국의 수많은 치킨집이 왜 그렇게 ‘우수’하느냐는 이유에 대해 “능력 있고 똑똑한 대기업 임원 출신이 튀기기 때문”이라는 허무개그가 더이상 허무하게 들리지 않는다. 한국처럼 김 부장의 인생이 ‘김 백수’로 급전직하하면서 삶의 질도 급격하게 무너지는 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데 고개를 주억거리는 중년 남성들도 많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김 부장’들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의 치열한 삶은 이 나라 경제를 단단하게 일군 가장 숭고한 역사다. 그들이 쌓아 올린 가치는 그 어떤 직함이나 직위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원형’(原型)이다.
드라마는 마침내 대기업 부장이 아닌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막을 내렸지만 현실의 수많은 김 부장들은 지금도 그 여정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세상 모든 김 부장들이 그 긴 여정의 끝에서 누구의 남편, 아빠, 아들이 아닌 가장 편안하고 진실한 자신을 마주하게 되기를 바란다. 부디, 친구 A의 예쁜 초승달 눈 모양처럼 환하게 웃는 김 부장의 모습을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이 글은 투데이신문 2025년 12월 5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