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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야기

by 성기노


어제 밤늦게 '잠깐' 동네 나섰다가 동대문 근처를 한바퀴 돌고 말았네요. 여기 산 지 20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찬찬히 동네를 둘러보는 건 거의 처음인 거 같습니다. 그동안 스쳐지나가던 단속적 기억들이 프레임을 통해 구체적으로 각인되네요. 카메라를 메고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길을 따라가다보면 왜 바로 그곳에 그 가게가 '위치'해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차로 다닐 땐, 카메라 없이 오로지 행선지를 위해 다닐 때는 몰랐던 모습들입니다. 카메라는 잊혀진, 혹은 무감각해진 인지 세포들을 깨우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진 노포와 새로 들어선 샵들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동네도 어느새 자본 순환의 한 복판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또 다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고 재건축 업자들의 아우성과 성화는 플래카드라는 얌전한 멍석 위에서 춤을 춥니다. 동대문에는 12시가 넘었음에도 인도를 가득 메운 옷가게(아마도 두타 등에서 밀려난 소규모 자영업자들인듯)들의 유독 빨간 빛을 발하는 전구들이 오늘 따라 유난해진 바람에 또 춤을 춥니다. 이렇게 인도의 노점상들은 불야성을 이루지만 고객들은 옷 쇼핑보다는 서로의 모습을 염탐하면서 무심히 지나갑니다.



빠알간 가로등을 찍다가 '래미안'과 골목의 오래된 주택이 오버랩됩니다. 초록물고기에서 한석규의 일산 집과 아파트 대단지가 오버랩되던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딸아이가 '아빠, 우리가 살던 청구동이 옛날에 성안에서 죽은 시체들을 갖다버리던 곳이었어?'라고 묻곤하는, 퇴화된 과거의 화석들을 동네 골목의 담장 이끼에서, 오래된 시멘트 조각에서 문득문득 느끼곤 합니다. 어디를 가도 우리는 이렇게 떠나보낼 수 없는 과거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현대화돼버린 현재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끼곤 합니다. 사진이 이 현기증을 치료해주는 '아스피린'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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