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도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녁 Sep 23. 2016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필름

lomography 400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부터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현상되어 나온 사진이 모두 하얗게 바래 있는 상상. 또는 온통 까맣게 그을려 있는 상상을. 꿈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상상이 현실이 되어 내게로 찾아왔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빅카메라에서 필름을 사서 포장을 벗기고 카메라에 장착했다. 이번에 구입한 필름은 lomograghy 400으로 3 롤이 한 패키지에 담겨 있었다. 후지나 코닥보다 저렴한 가격에 고민 없이 손이 갔다. 일본의 필름 가격은 너무 비싸 필름 하나가 현상, 인화비와 거의 맞먹을 정도다. 그런데 현상비와 인화비 또한 나의 상식 수준을 크게 벗어날 정도로 비싸다. 한 마디로 일본에서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셔터 한 번 누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한 끝에 겨우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한 장의 사진이 나오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망설임과 싸워야 한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돈으로 이어지는 이 열악한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그 신중함이 사진의 질과 이어진다며 좋겠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망설이는 시간과 사진의 질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꽤 저렴한 필름을 구입한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퇴근길 와세다에서 타카다노바바까지 걸으며 사진을 찍었고, 해가 진 나카노의 후미진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쿠니타치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거리의 사진을 찍었고, 한가한 주말 베란다에 걸어 놓은 빨래를 따스한 햇살과 함께 찍었다. 새로운 동네를 가봐야겠다 마음먹고 퇴근하여 집으로 가는 길 아사가야라는 동네에 내렸다. 처음 와보는 동네는 언제나 그렇듯 설레는 마음을 선사해 준다. 이날도 설레는 마음을 품고서 이곳저곳을 걸으며 도쿄의 거리를 사진으로 담아냈다. 길게 이어진 상점가를 먼저 걸었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상점가 거리. 지붕으로 덮인 곳을 빠져나와 가로등이 길 한 복판에 균일하게 세우진 거리를 걸었다. 그 거리의 모습이 낯설어 사진을 한 장 찍고, 오래된 가게와 낡은 자판기를 모델로 사진을 찍었다. 역까지 돌아오는 길은 상점가 뒤쪽으로 이어진 후미진 골목을 헤매며 돌아다녔다. 도쿄의 매력은 이런 후미진 골목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주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역 근처에 왔을 때는 이미 36번의 셔터를 거의 누른 상태였다. 앞으로 한 두 방 정도 찍으면 필름을 감는 레버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필름을 되감고 현상소로 가겠지. 그리고 1주일 후에 현상되어 나올 사진들을 부푼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겠지.







역 근처에 선술집 골목이 보여 들어갔다. 마지막 한 장이 될지도 모르는 사진을 심혈을 기울여 찍었다. 그리고서 필름을 감으니 그대로 레버가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서도 레버는 돌아가 다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필름에 표기된 사진 매수보다 한 두 장 더 찍을 때가 없지 않았기에 그려려니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다섯 번 정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후로는 될 대로 대라지 싶어 마구마구 셔터를 눌러댔다. 셔터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눌러졌다. 셔터 누르기도 지쳐서 필름을 되감았다. 세네 바퀴 돌리니 탈칵하는 느낌과 함께 필름이 다 되감긴 것을 알았다. 그래 필름은 애초부터 카메라 필름 장착부에 제대로 감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사진을 찍은 것이고. 카메라 뚜껑을 열고 필름을 꺼냈다. 이대로 현상을 맡긴다면 새까만 사진을 36장 받아 들게 되겠지. 내가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테지.






나는 결국 그 필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상소에도 맡기지 않았다. 그 필름 안에는 내가 심혈을 기울여 찍었던 거리의 모습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아마도 내가 죽는 그 날까지 그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 필름 안에는 분명히 내 추억들이 담겨있다. 내가 걷던 그 거리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나는 이 필름을 언제까지고 간직할 테고 이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필름을 보면서 그때 그 거리들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