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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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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Aug 30. 2016

하나비

はなび


개찰구를 빠져나오니 역내는 이미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모두 하나비를 보러 온 사람들이다. 타치카와 역에 몇 번이고 와 보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일상(日常)의 공간이 언제고 이상(異常)의 장소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평소와 다른 건 단지 사람의 수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 자주 먹던 보석바의 얼음 알갱이처럼, 유카타의 모습이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에 휩쓸려 하나비 장소인 쇼와 기념공원으로 향했다. 노면전차가 지나다니는 선로 아래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녹색의 잔디가 있어야 할 곳엔 모두 파란 돗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서 사람들은 저녁 놀을 맞으며 어서 하나비가 시작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노면전차가 오른편 위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미리 준비해온 음식과 맥주로 벌써부터 흥겹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곳에 그려질 오천 송이의 불꽃을 상상하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왼편으로는 녹색의 철제 울타리가 있었고 그 안으로 넓은 공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노을 지는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케아를 지나 공원으로 가는 길. 내 앞으로 유카타 차림의 여성들이 이제 곧 사라질 햇살을 맞으며 유유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져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해주었다. 유카타가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 매미가 시원하게 울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유카타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 


공원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 큰 공원에 나 하나 앉아서 하나비를 볼 자리를 찾을 수 없다니, 감탄과 동시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자리를 찾아 공원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했다. 하나비 덕분에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곳까지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폐장을 하는 공원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는 특권도 누릴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더이 상 갈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달콤한 사탕 주위로 개미 때가 모여들듯, 하나비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공터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본 사람들의 질서의식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더라면 이곳은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료 관람석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바리케이드 앞에 서서 곧 있을 하나비를 준비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가지고 온 카메라를 테스트해보는 게 다 이긴 하지만. 밤이 되니 사진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무슨 배짱으로 삼각대를 준비해오지 않았던 걸까. 불꽃이 터지는 모습만은 잘 잡아주길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흔들리는 모습 때문에 더 그럴듯한 사진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헛된 기대를 품어보며 점점 짙어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서는 어떤 어르신이 삼각대에 똑딱이 카메라를 고정시키고서는 근엄한 표정으로 묵묵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불꽃은 그 어느 낌새도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 검은 하늘 위로 수십 발의 불꽃이 하늘을 밝게 수놓았다. 그 불빛은 공원 공터에 앉아 있는 사람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둠뿐인 공간에 수천 명의 실루엣이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하나비가 시작됐다. 하나비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 시야 한 가득 들어오는 그 불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한없이 벅차올랐다. 불꽃이 터지고 잠시 후 그 폭음이 가슴을 울렸다.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듣는 폭죽음은 이 여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였다. 조그만 빛줄기 하나가 가냘픈 바람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치솟는다. 사람들은 숨죽이고 그 소리의 끝을 기다린다. 이윽고 소리는 촘촘히 박힌 커다란 불꽃으로 변해 하늘 가득 부풀어 오른다. 불꽃이 남기고 간 불씨들이 한동안 바람을 따라 하늘 위에 머문다. 그 불씨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른 불꽃이 다시금 솟구쳐 오른다.





결국 나는 단 한 장의 하나비 사진도 찍지 못했다. 그 불꽃의 모습에 매료된 나에게 카메라를 만질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두 눈에 그리고 기억 속에 담아내고 싶었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본모습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 분명했다. 내가 느꼈을 그 감동을 사진은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삼각대가 있었더라면, 더 많은 준비를 해 왔었더라면, 아마도 난 수십 아니 수백 장의 하나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진을 찍느라 정작 하나비의 모습은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비가 끝나고 어두운 공원을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빠져나가는 관경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 홀로 걷는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정작 혼자서 하나비를 볼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쓸쓸한 감정을 돌아가는 내내 느껴야만 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 걸 견디지 못해 혼자서 하나비를 보러 오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던 곳을 빠져나와 이렇게 홀로 걷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눈 앞에서는 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아른거리고 가슴을 울리던 둔탁한 소리가 느껴지는데, 그 환호성과 감탄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맴돌고 있는데, 나는 이 조용한 골목을 혼자서 걷고 있다. 마치 방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이 아주 리얼한 꿈처럼 느껴졌다. 한 여름밤 대청마루에서 별을 보며 꾸었던 그 시절 아주 생생했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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