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따듯하게
-다음날. 서귀포시로 가기 전에 중간쯤에 있는 사려니 숲에 가기로 했다. 시티투어버스라는 걸 알게 되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일반 버스보다는 몇 천 원 더 비쌌지만 갈아 탈 필요 없이 한 번에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전날 공항에서의 북적함과는 다르게 시티투어버스에도 사려니 숲에도 사람은 많지 않았다.
-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정말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게다가 겨울이라 숲에는 초록이 거의 없었다. 마른나무들, 낙엽들... 어디를 둘러봐도 채도 낮은 풍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인터넷이 안 터져서 음악을 듣는 대신 까마귀 울음소리, 자박자박 발소리 등을 배경 음악 삼아 걸었다.
-사려니숲은 축축했고, 외로웠고, 신비롭게까지 느껴졌다. 흐린 날씨와 잘 어울렸다. 그 분위기에 홀려 계속 걸었다. 갑자기 왈칵하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벅찬다는 감정을 제주에 오기 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아름다운 곳이었다.
-시티투어버스가 올 시간이 가까워져서 아쉽지만 숲에서 나왔다. 위미리에 가기 위해서는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시티투어버스에서 내렸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같은 처지의 어떤 언니와 대화가 트였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같은 버스를 타고, 옆자리에 앉아, 그 언니가 먼저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신기하게도 공통점이 많았다. 혼자 왔고, 제주시에서 첫날을 보냈고, 사려니숲에 갔다가, 위미리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만났고, 다시는 보지 못 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서로의 걱정까지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깊게 알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스쳐 지나갈 인연이기에 부담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이었을까.
-혼자 하던 여행에 그 언니와의 대화로 외로움이 밝혀졌듯 그 언니에게도 그 시간이 따뜻했었다면 좋겠다. 소박한 대화라도 마음을 밝히기엔 충분하다. 오늘 내가 거는 대화로 누군가의 마음의 온도가 조금이나마 올라갔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