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벙대고, 헤매고, 울었지만 너 때문에 웃었다.
대학에서의 첫 겨울방학.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여행 계획을 완성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예쁘고 유명한 관광지를 고르고, 아기자기한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몇 번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다.
드디어 떠나는 날. 하필 그 날 김정일이 사망했다. 김포공항에선 텔레비전마다 온통 김정일 사망 관련 뉴스를 보도했고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내가 제주 가는 걸 알고 있던 지인들은 제주에서 돌아오지 말라고 농담과 걱정이 섞인 말을 했다. 철없는 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른 채, 떠난다는 설렘과 처음이라는 긴장만을 안고 티켓팅을 하고, 게이트를 찾고, 비행기에 나를 실었다.
1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에 오렌지주스까지 받아먹고, 신나서 구름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제주공항 도착. 미리 시뮬레이션 한대로 공항에서 나와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조금 헤매긴 했지만 네이버 지도와 GPS의 도움을 받아 곶자왈이 있다는 에코랜드에 도착했다. 부슬부슬 비가 오긴 했지만 맞고 다닐만했다.
12월은 비수기라 그런지 관광객이 많이 없었다. 에코랜드를 도는 기차는 텅 비어있었다. 나만을 위해 기차가 움직이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곶자왈이 있는 역에 내려 '에코로드'를 걸었다. 걷는 내내 한국에 이런 숲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같은 나라 안이었지만 이국적이었다. 정글을 가보지 않았지만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축축하고 붉은 땅을 걷는 기분이 묘했다. 짧은 곶자왈 생태길이 끝나고 에코월드에서 나와 올레 5코스를 걷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첫 홀로 여행은 생각보다 무사히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잊지 못할 눈물의 저녁은 5코스를 걷다가 날이 많이 어두워져서 버스를 타려고 했을 때,
아무래도 에코월드에서 탄 버스에 두고 내린 것 같았다. 남원읍.. 서귀포시... 아니 제주도를 통틀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지갑 분실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기 전에 무서움이 먼저 찾아왔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걸어서 게스트하우스까지 가려고 했지만 당황해서인지 네이버 지도와 GPS의 도움으로도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112에 전화를 해서 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친절한 경찰 아저씨는 불쌍한 어린 여행자를 경찰차로 게스트하우스 문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그땐 몰랐지만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경찰 아저씨께 감사드립니다). 친절한 경찰 아저씨는 버스회사에 전화한 후, 분실신고까지 해주셨다(또다시 감사드립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그 전까지는 혼자서 해결해야 해서 그랬는지 눈물이 안 났는데 통화를 시작하니까 울음이 터졌다. 내가 그럼 그렇지. 그렇게 씩씩하고 침착 할리가 없지 내가. 엄마는 내가 돌아갈 때까지 쓸 만한 경비를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계좌로 넣어주신다고 했다-제주도는, 특히 서귀포시는 농협 아닌 은행 찾기가 정말 어렵다. 친절하고 착하신 사장님은 기꺼이 수고해주셨다(사장님께도 감사를....).
울음이 정리되고 상황도 정리될 즈음. 제주에서 떠나기 전날의 만찬을 즐기고 있던 언니 오빠들이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그날 밤. 처음 만난 아주 낯선 이들과 그토록 즐거운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게스트하우스에 경찰차가 와서 놀라셨다는 말, 스무 살 애가 혼자 온 것이 대단하다는 말, 제주는 어디가 너무 좋았고 무엇이 그렇게 맛있더라 하는 얘기들.. 한라산 소주에 세계맥주, 제주 막걸리까지 온갖 종류의 술을 마시며 웃고, 얘기했다. 꽤 많이 마셨는데도 취하는 거 같지 않았다.
취기가 슬금슬금 오르는 거 같아 바람도 쐴 겸 버스회사에 전화도 할 겸 나왔다. 아직 습득된 지갑은 없다는 말을 듣고 조금 우울해졌다가 한숨을 쉬려고 고개를 올렸다. 세상에. 너무 예뻤다. 말 그대로 흩뿌린 듯한 별들이 까만 밤하늘 위에서 반짝였다. 차가운 공기. 까만 하늘. 수많은 별. 순간 지갑이고 뭐고 다 잊혔다. 행복했다. 제주에 잘 왔다 싶었다.
나의 첫 제주, 첫 째날.
스무 살의 '나'처럼-지금도 어른은 아니지만- 덤벙대고, 당황하고, 헤맸지만.
제주, 너 때문에 결국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