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평화로움을 느끼며 걷기.
둘째 날. 전날 밤에 먹은 술이 과하긴 과했나 보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알코올 향이 풍겼다. 조식으로 토스트를 먹었다. 지금 같으면 술 마신 다음 날 토스트를 먹는 선택은 안 할 테지만. 올레 5코스를 마저 걷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12월 초의 제주는 따듯했다. 가을 날씨 같았다. 패딩을 가져 갔지만 더워서 낮 시간엔 거의 입지 않았다. 음악을 들으려 했는데 이어폰이 없었다. 지갑처럼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역시는 역시 역시다.. 근처에 편의점이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그냥 걸었다. 걷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길 위에선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 가끔 새소리, 그리고 내 발소리만 들렸다. 느릿느릿 걷기 때문에 주변 풍경은 빠르게 변하지 않는다. 귤나무의 초록과 노란빛 도는 귤, 돌담의 회검정, 파란 하늘... 선명한 색들을 눈에 담아가며 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 조금 지루해질 때쯤. 말동무도 없고, 주변엔 아무도 없겠다 핸드폰의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셀카 모드로 해놓고선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닌데 존댓말을 써가면서. 난 가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요리 방송을 찍었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볶음밥 하나를 만들면서도 "양파는 이렇게~ 썰어주시고요" 하며 야채를 썰고, 볶기 전엔 접시에 가지런히 담은 후에 프라이팬에 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혼자 놀던 것처럼 이번에도 혼자서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있으려니 리포터가 된 거 같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5코스의 마지막 쇠소깍에 도착했다.
쇠소깍에서는 예쁘다는 말을 한 스물다섯 번 정도 했던 거 같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다는 쇠소깍. 에메랄드 빛 물은 그 웅덩이에 담겨 잔잔히 흘렀고, 바위들은 저마다 독특한 모습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었다. 이어지는 바다에선 파도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나갔다. 파도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다.
'투명카약'이 유명하지만 혼자서 카약을 탈 수는 없기 때문에 '테우'라는 전통뗏목을 탔다.
'테우'는 연결된 밧줄을 끌어당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뗏목이다. 테우를 이끄시는 분은 꽤 나이가 있어 보였다. '이 뗏목을 이 사람들을 태우고서.. 힘드시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연륜인지 힘이 좋으신 건지 배는 앞으로 앞으로 쭉쭉 나갔다. 아저씨는 밧줄을 당기면서 주변 바위의 이름까지 알려주셨다. 부엉이 같이 생겨서 부엉이 바위, 바위 두 개가 마주 보고 뽀뽀하는 거 같아서 키스 바위.. 재미난 이름의 바위들이 많았다.
나의 2011년 제주엔 음식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다. 아직 혼자 밥 먹는 게 어색했고, 걷다 보면 밥 때를 놓쳐서 버스 안에서 김밥을 먹거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었다. 없는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음식은 바로 갈칫국이다. 쇠소깍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져서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갈치조림을 먹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엔 양도, 가격도 너무했기 때문에 갈칫국을 시켰다.
갈칫국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간 것도 아니었고.. 그 전에, 갈칫국이 뭔지도 몰랐던 서울 촌년이었기 때문에 별 기대가 없었다. 보통 매운탕처럼 얼큰한 그런 종류의 음식이겠거니 짐작했다. 하지만 다른 반찬과 함께 나온 갈칫국은 맑았다. 당황. 혹시 비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한입. 헉. 시원하다. 세상에 딱 내 스타일! 순식간에 호록호로록 다 먹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음식에 감동을 받아서인지 서울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시원한 갈칫국이 생각났다.
쇠소깍과 올레길을 떠올릴 때면 머릿속에서 음소거 상태로 재생된다. 그 속엔 사람도 없고. 움직임도 거의 없다. 그게 참 좋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의 나는 가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다. 목소리도 크고, 리액션도 크다. 음악도 힙합을 좋아한다. 난 내가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이런 내가 혼자 하는 여행, 조용한 공간, 누구와 대화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들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건 제주에 와서 발견한 나의 다른 면이었다. 혼자 걸으며 누리는 시간과 공간을 '나'로 온전히 채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