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이야기
눈이 녹지 않는 골목을 따라, 가은은 봉투를 품고 걷고 있었다.
겉으론 담담한 척했지만, 손끝은 자꾸 봉투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여운형 선생님이라니… 책에서 본 이름이잖아.’
조선일보 건물 뒤편, 지정된 장소.
골목 안은 스산했다. 길모퉁이에는 짚신을 신은 행인 하나가 다가오는 가은을 힐끔 쳐다보았다.
‘진짜, 별일 없이 전달만 하고 오자. 그냥 심부름이야, 심부름…’
그때였다.
담장 쪽에 누군가가 고개를 들었다.
헌 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봉투, 가져왔느냐?”
낮은 목소리. 딱딱한 말투.
가은은 움찔했다.
“그쪽이… 여운형 선생님이세요?”
그는 잠시 정적을 두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운형이오. 자넨 누구지?”
“저는… 강가은이라고 합니다.”
그는 봉투를 건네받으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강가은… 낯선 이름이군.”
가은은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백 년쯤 뒤에서 왔으니까요…’
여운형은 봉투를 열지 않고 안쪽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이리 오시게. 잠시 이야기나 하지.”
작은 방. 등잔불 아래, 여운형이 책상에 앉았다.
벽에는 격문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한쪽에는 ‘해방’이라는 두 글자가, 간절한 염원처럼 박혀 있었다.
“가은 양. 자네, 참 이상한 말을 하더군. 형무소에서 나왔다고.”
가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뇨, 그게 아니에요. 저는… 사실은—”
여운형이 손을 들었다.
“괜찮소.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지. 자네가 이쪽 사람은 아니라는 건 느껴졌소.”
“...믿으세요?”
여운형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믿는 건 아니오. 다만, 자네 눈빛이 거짓을 품고 있진 않았소.”
가은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는 말이 느렸고, 눈빛은 깊었다.
“해방이란 말, 들어봤소?”
가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망설이며 말했다.
“근데요…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운형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질문이 많구먼. 좋아. 해보시게.”
“해방이 되면요, 뭐가 그렇게 달라지는 건데요? 그냥 일본이랑 싸우는 거잖아요?”
여운형은 손을 깍지 낀 채, 천천히 말했다.
“해방은 단지 일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오.
사람답게, 떳떳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지.”
그는 가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만일 자네 말대로, 백 년 뒤에서 왔다고 치자고.
그런데 그 나라가 친일을 눈감은 채 해방을 맞았다면…
그건 과연 진짜 해방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민족을 팔아 한몫 챙긴 자들이 그 해방 뒤에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면…
그건 떳떳한 세상이라 말하긴 어렵겠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일본 때문만은 아니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선을 만들기 위함이지.”
가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문 밖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
누군가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순사들입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운형이 조용히 봉투를 품속에 넣었다.
“가은 양. 이 길로 따라가시오. 이 골목 끝, 담벼락 뒤쪽 문.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가은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네. 고맙습니다.”
그 말만 남긴 채, 그녀는 다시 골목 속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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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고] “그 아이, 진짜로 보내도 괜찮겠어?” 세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릴 판다면?”
영희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믿어보고 싶어. 나도 누군가 처음 날 믿어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