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어느 허름한 가옥.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세진은 창가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고, 영희는 문지방에 앉아 작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 애, 진짜로 보내도 되는 거야?”
세진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딘가 흔들렸다.
영희는 대답 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선생님이 맡기셨잖아.”
“선생님은 세상을 믿지만, 우린 그러면 안 돼.”
그때,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가은이 서 있었다. 눈빛이 단단했다.
“계속 의심하시네요.”
“당연하지.” 세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뿐이야.”
가은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이에요?”
영희가 나섰다.
“격문을 전해야 하는데, 전달책이 잡혔어.
원래 보따리 상인을 통해 전하려 했는데, 장터에서 끌려갔어.”
“그럼 제가 하라고요?”
“그래. 넌 우리 조직과 연관된 게 없어.
어차피 누구도 널 믿지 않으니까, 오히려 안전할지도 몰라.”
가은은 살짝 웃었다.
“어쩐지 위로 같지 않은 위로네요.”
영희는 웃으며 종이 뭉치를 천 보자기에 싸서 건넸다.
“이걸 장날 아침, 신당 앞 노점상 아저씨에게 전해 줘.
‘조청도 한 잔 주세요.’ 그 말만 하면 돼.”
“알겠어요. 안 잡히면 되죠?”
다음 날, 경성 거리.
가은은 장터를 지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낯설던 거리도 이제 조금 익숙해졌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쿵쾅댔다.
신당 앞 노점상은 국물이 펄펄 끓는 솥 앞에 서 있었다.
가은은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조청도 한 잔 주세요.”
노점상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보리떡을 건넸다.
“이건 서비스.”
가은은 그걸 받아들고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오이, 소코노 쇼죠! 나니 오 시테이루?”
(거기, 소녀! 뭐 하고 있는 거냐?)
가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본 순사였다.
그는 다가오며 뭔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코 카라 키타? 코노 후쿠와 난다?
(어디서 왔냐? 이 옷은 뭐냐?)”
가은은 굳어버렸다.
단어 몇 개는 들리는 듯했지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진짜 못 알아듣겠어… 어떡하지…’
순사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훑어보며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였다.
“스미마셍, 카노조와 토모다치데스!”
(죄송합니다, 그 아이 제 동생입니다!)
세진이 옆 골목에서 뛰쳐나왔다.
능숙한 일본어였다.
“코노 코와 고쿠민가쿠코우 노 세이토데스.
치치가 잇코쿠마에 시보시테, 시죠우니 이테마시타.”
(이 아이는 국민학교 학생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순사는 뭔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다, 아노 후쿠와…”
(그래도 그 옷은 이상한데…)
“미나이데 쿠다사이. 모토모토 시타키리 수즈메노 쇼죠가 스키데…”
(무시해 주세요. 옛날 동화 ‘혓바늘 참새’에 나오는 소녀 복장을 좋아해서요.)
순사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모시이까이데.”
(다음엔 조선 애처럼 입혀.)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가은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진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넌 진짜... 어떻게든 문제를 만드는구나.”
“...고마워요.”
“한 번뿐이야. 다시 이런 일 생기면... 모른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가은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보리떡이 여전히 들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아래엔 쪽지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제법 괜찮네.
— 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