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움직이는 이유에는 항상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리 거창한 이유가 없을 수 있다. 동기는 행동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타인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 정작 행동한 사람을 정말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동기’라는 이유를 만들어 그것을 이해하려고, 좀 더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사람은 가끔 그 순간의 기분으로 스스로를 움직일 때가 분명 존재한다.
지도 따라 맛집을 찾아가는 중에 만난 작은 카페의 문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가는 것 얼죽아만 외치던 사람이 이날은 문득 아바라(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주문하는 날 절대 내 타입이 아냐!라고 단언했던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애프터를 신청한 때
평소 꽤나 계획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에 항상 이성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물음표(?) 하나에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
이건 꼭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야!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은 아니라도, 내가 미리 예상하지 못한 것을 행동하고 있을 때 그것 또한 도전의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서론이 이렇게 거창한가 하니, 내 눈앞에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크루아상의 영롱한 빛을 보며 과거 기름과 퍼석거림을 합쳐놓은 기괴했던 내 '첫 크루아상(이 되고 싶어 했던 반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루아상은 프랑스어로 '초승달'을 의미하며, 오스트리아 빵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통해 프랑스로 넘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슷한 유래로 그녀의 사랑스런 디저트 '마카롱'이 있다)
지금은 냉동 생지까지 나와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고(애정합니다, 에어프라이어) 프랑스인도 놀라 뒤집어질 '크로플'(크루아상+와플)이라는 현지화 제대로 된 K-간식까지 등장할 정도이지만, 그 빵의 모양과 향을 일본 만화로만 추측해야 하는 시절도 나에겐 존재했다.
초등학생 때 집에 가스레인지를 바꿔야 할 때가 있었다. 부모님과 전자제품 매장에 갔던 나는 가정용 오븐이 딸려 있는 그곳에서 가장 큰 가스레인지를 사고 싶다고 부모님에게 떼를 썼다. 부모님은 내가 '노희지의 꼬마 요리사'를 보고 '요리사'가 되려는가보다는 생각에 큰 맘먹고 그 물건을 사셨지만, 난 단순히 책에 있는 맛있어 보이는 빵을 '먹고 싶다'는 욕심만 넘쳐났던 것 같다. 엄마가 장을 보실 때 몰래 장바구니에 넣어놓은(그 당시 덩어리로밖에 팔지 않던)버터까지 고이 모셔놓고는 밀가루와 열심히 반죽하며 만들었던 것이 이 빵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결과물은 처참했다. 분명 책에 있는 대로 반죽을 하고 온도랑 타이머까지 맞췄지만,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완성된 건 잘 뭉쳐진 지점토 반죽 같은 물체였다. 중간중간 버터가 녹아 지글지글 흘러내려 마치 후라이팬에 올려놓은 기름 같았고, 은박지 위에 착 달라붙은 반죽은 입에 넣기 전 은박지 조각을 하나하나 떼어내어야 했다. 손에 힘을 주어 갈라보려 하니 '덩어리'는 뚝- 하는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이상하다. 책에서는 폭신폭신하고 버터향이 고소하다고 했는데, 이건 푸석푸석하고 밀가루 냄새밖에 나지 않는다. 마음처럼 나오지 않았던 결과물에 '이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하나.. 엄마 오기 전에 치워야 하는데...'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그저 신기한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빵집에도 없는 그 예쁜 빵은 과연 무슨 맛이 날까? 하는 생각에 부침개 반죽도 못하는 꼬마가 무턱대고 시작해 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인 걸까 생각이 들지만, 그땐 나름 신세계를 개척하는 콜럼버스와 같은 마음으로 큰 버터를 뚝뚝 썰어 낸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손을 대지 말자 주의로 살고 있는 내 모습과는 대조되는 기억이다. 하지만 그때 그 무모한 도전 때문에 가끔 맞이하는 이 황홀하고 탐스러운 초승달 빵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비록 부모님의 '혹시 우리 아이도 요리사가?' 하는 기대에는 충족시켜 드리지 못했지만, 그 경험이 쌓여 나름 내 삼시 세 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얻게 되었다. (경험에 비례하여 음식 쓰레기도 산처럼 쌓여갔지만 말이다)
미래를 바꿀 커다란 시작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내 인생’이란 연극이 막을 내렸을 때, 이런 작은 애드리브 하나에 무대에서 내려온 내가 웃을 수 있다면, 관객이 보내는 환호보다 더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