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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Mar 24. 2024

누군가 만들어 놓은 마디


밤 12시가 지나면 다음날이 시작된다. 밤 12시를 기점으로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고, 4월에서 5월이 되고, 가을에서 겨울이 되고 곧 새해가 시작된다.

우리는 시계 바늘로 시간을 기억하고, 달력을 보며 날짜가 지나갔다는걸 알게 된다.

계절의 한자는 계절의 마디라는 의미라고 한다. 끊김없이 연결되는 시간을 인위적인 마디로 끊으며 우리는 시간이 흘렀다고 기억을 한다.

어쩌면 단순한 숫자의 변화로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In daylights, in sunsets,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In inches, in miles, in laughter, in strife
In 525, 600 minutes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the life?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그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인생의 시간


뮤지컬 렌트의 주제가처럼 나의 시간은 무엇으로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침에 일어날 때 이불 밖으로 느껴지는 공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길이.

집에 오는 길에 보이는 나무 잎의 색깔.


몇년 전 2주정도의 시간동안 방문했던 스페인은 짧은 순간에 그 당시의 계절을 강렬하게 새기고 지나간 시간이었다. 추석을 끼고 간 휴가였기에 그 시기는 가을이었다. 여행을 갈 때도 가능하다면 가을에 시간을 맞춰 휴가를 잡는다.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게 아니라면 그 시기에 많은 나라들이 가을을 맞이하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느겼던 뜨겁고 습한 공기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때 이제 떠나는 시간이 다가온다라는 생각에 두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난 가을이 좋아한다. 따뜻함과 서늘함이 섞여 흘러드는 바람도, 봄보다 가볍고 여름보다 순해진 가을 햇빛도, 두둥실 떠오르면 구름 위까지 떠오를 것 같은 높은 하늘도. 여름을 이기고 만난 계절이라 그런건지, 햇빛에 약한 내가 무기력해지는 기간을 견뎌내고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드는 그 청량함을 좋아한다.


최근에 다녀온 여행보다 오히려 이 여행이 더 기억이 강렬하게 남는다. 아마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낮설고 새로웠고 약간의 두려움도 남아있던 시간이라 더 그렇게 남은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에피소드들이 한 몫을 했다.

우연히 들어간 젤라또 집에서 사장님이 서비스라며 젤라또 위에 부어주신 럼주 한 잔.

자신의 타일 컬렉션을 보여주며 눈을 반짝이시던 민박집 사장님

알함브라 궁전 야경과 카르멘의 'If could'를 술안주 삼고 있는 나에게 과자 한 봉지를 선물하고 가신 윗집 할머니.


작은 친절이 위로가 되었고, 그 친절에 반응할 수 있었던 내가 있었다.

이제는 어딜 여행가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덤덤해져 특별한 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여행도 두근거리지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계속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는 건 그 때 느꼈던 긴장감과 행복함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이다. 나를 품었던 시간의 공기와 타인의 웃음, 귀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자유가 내 기억 안에 기록되어 있다. 풍경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순간마다 내 시간의 마디를 남긴 누군가 덕분에 그 시간은 행복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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