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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i Jun 24. 2024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최애가 누구예요?"

몇 달 전 좋아하는 예능에 처음 보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 나왔다. 티저로 몇 번이나 누가 나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듣고 잊어버리기를 반복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화면의 얼굴을 보니.. 정말 누군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그 그룹을 봤다고 이야기하니 후배들이 내 최애가 누구였는지 묻는다.

아이돌 누구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내 찐 아이돌 팬질은 H.O.T.에서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들어온 신입들에게 말하면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그게 누구지?'하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게 보일 정도로 오래전에 나왔던 그룹이었다. 또 선배들에게 말을 하면, '네가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며 아리송하게 생각할 정도로 내 나이와 묘하게 미스매칭 되는 아이돌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데뷔해서 중학교 때 해체했으니, 그 당시의 팬이 주로 중고등학생들 이란걸 생각했을 때 그들이 내 마지막 아이돌이라고 한다면 어느 나이대든지 물음표를 띄우게 되는 답변이 될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라고 하는 것에 굉장히 신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생작', '최애' 같은 'My Favorite thing'을이 무엇인지 리스트를 세울 때 고민이 꽤 길어진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최고의 타이틀을 준 것은 꽤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올라오지 못하는 후보들만 여럿 만들어 놓은 채 최고의 빈자리를 채운다. 덕분에 최애 말고도 후보들에 대한 정보도 솔찬히 알고 있어 그들의 팬과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아이돌 팬으로서만 20년 전으로 고정된 것뿐이지, 그 사이에 다른 분야로에 하나하나씩 최애는 존재했다. 그것 또는 그들의 공통점은 한 번 정해지면 10년 정도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과 정말 어느 순간 왜?라는 물음표와 함께 푹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최애에게 빠진 가장 웃겼던 기억은 공연 무대를 보다가 배우가 등장하는 걸음걸이부터 빠져버린 때였다. 그날은 하필 그 배우의 음이탈까지 있었음에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배우에게만 시선이 갔던 적이 있다. 그 앞뒤에도 유명하다는 배우들도 많이 봤지만 그 순간의 강렬함은 한동안 다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인물이나 실력이 굉장히 출중한 것도 아니다 보니 스스로도 왜?라는 물음표가 계속 뜨길래 확인을 하기 위해 차기작을 보러 갔다. 거기서도 어김없이 어느 한 장면이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바람에 '내가 좋아하는 게 맞는구나'를 인정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 최애가 주기적으로 바뀌는 친구가 있다.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이 누구인지 찾으려면 그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보면 될 정도로 트렌드에 정말 예민하게 반응하는 친구다. 아이돌의 덕질은 다른 덕질과는 조금 다르게 끊임없는 물량공세(떡밥)의 홍수 속에 살 수 있다. 그 안에서 팬들만의 커뮤니티도 크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시간을 모두 쏟아부어도 부족한 시간을 살 수 있는 것 같다. 내 최애가 아이돌이 아니다 보니 그런 모습들은 나에게 생소한 것이기도 했지만, 내 삶의 절반 이상에 2D의 어떤 존재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더욱 신기할 때름이었다. 어느 날 친구에게 대체 저 존재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래 너의 말이 항상 기승전최애로 끝날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여전히 누군가를 보면서 두근거릴 수 있다는 게 좋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삶의  큰 행복이야."

나를 항상 10대의 두근거리는 소녀로 만드는. 작고 소소한 것으로도 친구들과 꺅꺅 거리며 좋아했던 그때의 나로 돌리는 존재가 최애가 아닐까.

어떤 존재든지 내 삶을 윤택하게 흘러가게 하기 위해선 윤활유 역할이 필요하다. 그 존재로 인해 나는 원래의 나보다 더 들뜰 수 있고 더 기운찰 수 있으니까.

느리고 길게 유지되고 있는 내 최애들도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각자 차지하면서 그 시절의 내가 힘을 얻을 수 있게 도와준 존재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갓생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계발을 위한 것도 아니고, 마음 챙김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는, 매일같이 걸어가는 이 길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스트레스받는 사무실에서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인생비타민c 같은 존재들. 그들(생물이든 무생물이든)이 있음으로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웃을 수 있는 것 같다.(새 떡밥이 나올 테니 말이다)



그 친구가 또 말했다. 최애는 내가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속 문을 두드리고는 '똑똑. 누나 내가 누나 최애예요.'하고 들어온다고. 이 말을 하는 친구의 얼굴은 어쩜 그리도 진지하고 해사한지.

얼마 전에 내가 친구의 말을 정정했다. 최애는 노크를 하며 조심스레 찾아오지 않고 응? 하는 사이에 문을 부숴버리고 들어오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왔는지 알아차리기 전에 어느새 내 방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기분이어서 손 쓰기엔 이미 늦어버린 거라고. 최근에 찾은 최애에게 겪은 내 경험담이라고.  

우리는 책상을 치며 깔깔거리는 여고생처럼 신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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