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하나밖에 없기도 했지만 앉을자리 없는 방 하나에 잘 보이지 않는 그림을 오래 보고 있기란 쉬운 게 아니라 금방 나오게 되었다.
(살짝 습기 찬 방 안에 살짝 색 바랜 '최후의 만찬' 그림이 정말 하나 딱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나니 도시를 떠나는 다음날까지 할 일이 없는 상황이 생겼다
여행 와서 뭘 할지 고민하다니...
일단 두오모부터 가볼까? 하는 마음에 뚜벅뚜벅 걸어갔는데 이게 왠 걸? 두오모 관람+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 갤러리아 산책까지 점심 먹기 전에 끝나버려 난감해하고 있었다.
어젯밤 눈물로 도착한 첫날이 무색할 정도로 생각했던 관광코스가 오전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끝나버리다니....
두오모 성당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는데 두오모 뒤쪽에서 멋지게 자리 잡은 스칼라 극장을 발견했다.
멋진 건물에서 저녁에 느긋하게 공연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학생 신분으로 이런 극장에서 공연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생긴 것만 봐도 일단 비싸 보이는 비주얼이다.
안에 들어가지 못하니 주변이라도 구경해볼까 하는 마음에 한 바퀴를 돌고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난 뒤 생각해 보니 이게 신의 한 수였다)
그런데 쪽문 같아 보이는 곳 주변으로 사람들 몇 명이 올망졸망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뭐지? 하는 궁금증으로 나도 같이 주변을 기웃거렸더니, 쪽문이 열리더나 직원 같은 사람이 나와 작은 종이쪽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역시나 뭐지? 하는 마음으로 나도 한 장 받았는데 오후 5시에 오면 5유로에 티켓을 교환해 준다는 교환권이 아닌가! (이 이야기는 티켓을 받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뭔지 모르지만 주는 건 일단 받고 보는 한 푼이 아쉬웠던 여행객의 모습)
사실 이때는 카드를 무서워 못쓸 때라 현금이 한정되어있다는 생각에, 5유로도 무서웠던 시기여서 이 교환권을 가지고도 갈까 말까 고민을 하던 시기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갈까, 말까?
생각지도 않게 할인표가 생긴 거지만, 공짜표가 아닌 것에 약간 반쪽자리 행운 같은 기분에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아직 5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 시간이 돼서 생각해 볼까?
고민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나 혼자의 셰스타를 지키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점점 졸려온 까닭이다.
여행 중이라고 평소보다 티 내면서 더 바닥나는 내 체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길 가다 만난 시장에서 야무지게 챙긴 점심
자고 일어나니 긍정적으로
40분의 꿀잠, 20분의 이불 부시럭을 끝내고 다시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극장 앞에 도착하니, 역시 이런 경험도 있어야 재밌는 거라 생각해 5시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 도시에서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 즘은 남길 수 있겠지.
주변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남은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 한 잔과 어제 기내식에서 남은 빵 하나로 간단한 식사를 마쳤다. 뭔가 학교에서 용돈 아끼느라고 학교 매점에서 김밥 한 줄, 와플 하나로 끼니를 때우던 때가 생각나서 우스웠다. 이 먼 타국에 와서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게 웃겼다
5시에 티켓을 찾으러 갔다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남은 2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식사로 결국 밥값이 나가게 되어 조금 슬펐다.
(소심했던 탓에 이미 저녁을 먹었다는 말도 못 하고 그들과 함께 간 식당에서 가장 싼 샐러드를 시켰다)
살짝 아픈 마음을 품고 본 스칼라 극장
이렇게 예쁜 극장으로 들어가 보니 내가 받은 티켓은 맨 꼭대기층의 측면 좌석이었다.
일행은 우측, 나는 좌측 블록이어서 잠시 안녕을 하고 서로의 자리를 찾아갔는데, 끝나고 나와서는 인파에 휩쓸려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일행의 정보에 따르면 이 날의 공연은 고전은 아니고 최근 음악이라고 했다. 처음엔 혼자 왔으니 쭈뼛거렸던 것도 있었는데, 곧 예쁜 극장 안의 모습에 오~ 하며 혼자 감탄하며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서 남은 사진은 없지만, 4층 꼭대기에서 저 멀리 무대를 내려다본 것이 기억이 난다
여행지라고 문화인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래 클알못이기도 한 터라 아는 음악이 나오지는 않아서 2시간의 공연 중 1시간 반은 졸면서 보낸 거 같다. 문득 깨어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함께 졸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보여 안심이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아까 만났던 일행을 찾아야 했지만, 이미 핸드폰은 미아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 둘러보다가 일찍 포기한 채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떠오르는 슬픈 첫날이여....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만난 우연의 만남들에 대해 생각했다
우연히 들어간 골목에서 공연 할인 티켓을 만나고,
티켓 교환하러 간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밥을 먹고,
처음 만난 외국인들과 공연 보면서 졸고.
계획 없었던 발걸음에 꽉 찬 하루를 만들어간 참 오묘한 하루였다.
계획 없이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더 즐겁게 느껴졌다.
남은 기간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자, 고 생각한 이 날의 계획(?)이 나의 게으름에 부스터를 걸어 결국 남은 10일의 일정을 무계획으로 여행하는 시간을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