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마지막 통화

밀라노 도착 10분 만에 소매치기 당한 썰

by Kiri

*시점은 대학교 4학년 1학기 첫 1주일을 버리고 떠난 2010년 2월





밀라노의 도착한 날은 '비 주륵주륵'이었다. 쏟아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맞고 있다 보면 옷이 젖어드는 빗줄기였다. 그 비를 맞으며 난 밀라노 테르미니역 앞에 캐리어의 손잡이를 꼭 쥐고 그렇게 서 있었다.

공항 셔틀에서 내리고서는 숙소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픽업을 요청드렸다.

내가 입은 옷을 간단하게 설명드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 카메라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안으며 기다렸다.



도착한 시간은 9시가 넘은 데다 비까지 내리니 거라기 온통 어둠이 가득한 것 같았다.

손에 잡힌 짐은 묵직하고, 주변엔 알 수 없는 외국인 집단이 웅성웅성거리고.

물론 그들에겐 번쩍이는 금색 패딩에 짐꾸러미를 잔뜩 들고 있는 내가 더 이상한 외국인 꼬마겠지만, 15시간의 비행기로 지구 반대편에 도착한 나에겐 저 사람들이 언제라도 달려와 내 물건을 모두 훔쳐갈 것 같은 생각에 괜히 무섭기만 했다.



그저 일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었을텐데...... 무서워해서 죄송합니다


우산이 캐리어에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역 안으로 들어가면 방금 전화한 사장님이 나를 못 찾으실까 무서웠고, 여기서 캐리어를 열면 저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들 것 같이 무서웠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어둡고 흐릿하게만 보였다




통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어떤 사람이 한국말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이 이렇게 반갑게 들릴 수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손을 번쩍 들어 내가 여기 있음을 표시했고, 그 사람이 나를 데리로 온 숙소 스탭이란 걸 알게 되었다.

여기서 지하철로 더 가야 한다는, 조금은 어눌한 한국말을 들으면서 조금 여유가 생긴 나는 한 손엔 캐리어, 살짝 발개진 다른 한 손은 패딩 주머니에 쏙 넣었다




어?


반대쪽에 있나?


어??


바지에 넣었나?


?!


가방에 넣었나?




없어?????







아저씨 잠깐만요!!




앞서가는 아저씨를 급하게 불러 세우고는 내 몸에 붙어있는 주머니는 모조리 뒤집었다. 가방도 다시 열어보면서도 물건을 다 꺼내면 어디선가 소매치기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제대로 털어보지도 못했다.



휴대폰이 사라졌다!



분명 역에서 나오면서 숙소에 전화에 걸 때까지만 해도 있었다. 전화 후 어디 들리지 않고 바로 픽업 장소에 나와있었다. 행여 지나칠까 봐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보고 바로 이 장소에 나와 서 있었다.


주머니에 누가 손을 넣은 느낌도 없었는데, 내 옆을 누가 가까이 지나간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역으로 찾으러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상황이 되니 앞에 있는 나를 데리러 온 숙소 사람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계속 발만 동동 구르며 어? 어? 하고 반 울고 있는 나에게 아저씨는 자신이 짐을 봐줄 테니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보라고 했다

난 짐을 맡기고 뛰어가면서도 '그래, 여권이랑 카메라, 비행기표, 돈 절만은 나한테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머릿속으로 계속 스스로를 안심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저 캐리어를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다!'


정말이지, 주의력은 없지만 그 와중에 생존력은 있다.





지나온 길을 더듬어 어두운 지하철을 내려가 보았지만 있을 리 만무했다. (대체 이탈리아 지하철은 왜 벽이 다 시커먼지 모르겠다. 사람 무섭게.....) 행여 떨어뜨렸더라도 금방 누군가 주워갔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대체할 때도 아니었고, 길을 찾는 용으로 사용할 것도 아니었다.

핸드폰은 어디까지나 내 비상연락을 위해 가져온 것이었고, 사심을 섞자면 바꾸고 싶은 마음도 있어 잃어버려도 된다는 생각으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잃어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어떻게 도착 10분 만에 없어질 수 있느냔 말이다.

아무런 느낌도 기운도 못 느끼고 이렇게 허무하게....






그나마 숙소에 전화라도 하고 잃어버려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음 이 비 오는 날 밤 처음 온 외국 지하철 역에서 노숙할 뻔 하지 않았나.

이 나라에서 전화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으면서 울었다. 정말 웃픈 밤이었다.



하늘에서 눈물이 내려와.....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못 찾았다고 말해오는 나에게,

아저씨는 너 같은 사람 많다며 날 위로하시며 숙소로 가는 길을 안내하셨다.




아저씨... 이렇게 빠른 시간에 물건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나요?

나중에 숙소에서 물건을 소매치기 당한 사람이 있다면 꼭 말해주세요

예전에 어떤 여자애는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도난당했다고

넌 그 사람보다 재수가 좋은 거라고



정말.. 잊지 못한 유럽의 첫날밤이었다.




P.S 난 이 여행 이후, 해외여행을 갈 때 여행자 보험 가입은 필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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