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MI Dec 04. 2021

'프로 사과러'의 조용한 반격

왜 모두 내 잘못이어야만 하는데?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장면이 또렷이 떠오른다.
나의 기억은 일인칭이었겠지만 웬일인지 지금의 기억은 마치 다른 이의 모습을 관망하는 듯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 나는, 낮잠을 자고 있는 엄마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고 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을 하고서 엄마가 잠에서 깰 순간을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나는 엄마가 선반에 고이 올려둔 도기 찻주전자를 떨어뜨렸고 찻주전자의 주둥이는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도자기가 깨지는 청아하면서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심장도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소리를 듣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낮잠을 주무시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엄마가 낮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며 울고 던 것이었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엄마는 게슴츠레 눈을 떴고 나의 모습을 보며 무슨 일이냐 물으셨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도기 찻주전자를 깨뜨렸다고 솔직히 말하며 용서를 구했으나 -나의 예상대로- 엄청나게 혼이 나고  일은 마무리되었다. 돌이켜 보면 "어디  다쳤어? 괜찮니?" 한마디 듣지 못한 것이  서운하기도 하지만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설사 다쳤다 하더라고 응당 ' '이라는 생각을 했던  같다.


 꽤 어린 나이부터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어린 두 동생을 돌보고 책임져야만 했던 첫째여서인지 아니면 그냥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작고 큰 사건과 갈등 속에서 늘 미안하고 잘못한 쪽은 나였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부당한 이유로 심하게 왕따를 당했을 때도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런 이유로 부모님께 감히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주변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 채 1년이라는 시간을 눈물로 보냈었다. 6학년이 되어 새 학기가 되고 나를 괴롭혔던 주동자들과 다른 반으로 갈렸을 때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복도에서 왕따 주동자 중 한 명과 마주치게 되었다. 분명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부터 그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아이가 코 앞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내게는 억만 년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일정한 속도로 흐르던 시간을 양 옆으로 있는 힘껏 잡아당긴 듯, 시간은 더 이상 흘러가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상태로 지속되었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숨기며 나는 고개를 푹 숙였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안녕?" 인사까지 건네고는 스쳐 지나가 버렸다. 한동안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더 기가 찬 일은, 그 아이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기보다는 안도감, 더 나아가서는 고마움까지 느껴졌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다행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13세의 소녀는 별반 다를 것 없이 세월을 타고 나이를 먹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도 이 문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 탓을 하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이 내 탓, 내 잘못 이었다. 직장에서 힘든 상사를 만나 괴롭힘을 당할 때도, 부모님께 가끔 엄한 잔소리를 들을 때도, 친구와의 갈등이 생겼을 때도 다 내 잘못이었다. 타인이 나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면 그 화살을 정통으로 맞는 것도 부족해 다시 한 번 더 스스로를 찔러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미안합니다.'와 '죄송합니다.' 이 두 문장은 내 인생에 없어선 안될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 사람들은 쉽게 사과하지 않는다.

 즉 독일 사람들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 좁게는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부터 넓게는 사회 시스템적인 부분까지 통틀어서 감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오가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손 치더라도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이 있으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는다. 대신에 '안타깝지만 (Leider/라이더)'이라는 말로 운을 떼어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전한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주기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공식 메일에는 '관리를 소홀히 하여 죄송하다.'라는 말이 일절 없었다. 그들이 일부러 코로나에 감염되려 노력한 것도 아니니 이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우편배달부의 불찰로 택배가 다시 돌아가더라도 보통은 사과를 받을  없었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한들 서비스 담당자는 배달자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이런 식이었다. 문제를 유발한 담당자와 직접 만날  없다면 문제 해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미안하다는 내용의 표현을 결코 들을  없었다. 이는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인 했다. 남편과 함께 일하는 독일인 동료들 사이에서도 문제 해결 과정 , 누군가가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흔하지 않았다.



나는 '프로 사과러'로서 깊은 혼란에 빠졌다.

 '다 내 잘못입니다.'를 외치고 살던 그 오랜 세월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게 온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히려 나의 습관적인 사과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을 제대로 풀지 못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사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과연 '잘못'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따르면 틀리거나 그릇되게, 적당하지 아니하게,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리에 어긋나게 함부로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어디에도  '기준' 나와있지 않다. 놀랍지 않은가? 무엇을 기준으로 틀린 , 그릇된 , 적당하지 않은지, 사리에 어긋나는지가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누구나 '잘못한 사람'   있다.

 과거엔 직책이 낮으면, 나이가 어리면 혹은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면 어련히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예의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한국에서의 사회적 의식이 변화하면서 예전만큼 사과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죄송하지만 고객님, '이라는 말로 운을 떼는 것이 일반화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떠한 상황이 되지 않는 것이 전화를 받는 이, 혹은 주문을 받는 이의 잘못이 아니라면, 실은 그들이 먼저 죄송하다고 누군가에게 조아릴 필요는 없다. 당장 어떤 일을 해결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 모든 책임을 떠안고 대신 사과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지나친 자책은 교만이다.

 사실 다 내 잘못이요 내 탓이라 얘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꽤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해 줄 것이라 착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자책의 이면에는 분명히 교만이 존재한다. '나'라는 한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그 문제가 애초에 해결될 수 있었으리라는 교만, 혹은 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지닌 사람이라는 안일한 교만 말이다. 심지어 분별없는 사과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초라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되어 스스로의 가치를 바닥에 내팽개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처음엔 갈등 상황에서 스스로를 가해자로 만들며 벼랑 끝까지 밀고 나가는 내 모습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독일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 및 여러 문제들을 맞닥트리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각성된 모양이다.


 그 후로 나는 꽤나 쉽지 않은 훈련에 돌입했다. 대화 중 습관적으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하면 의식적으로 삼켜 목 뒤로 넘겨버렸다. 문자 메시지나 메일을 쓸 때마다 의미 없는 '미안함'은 썼다 지워내기를 반복했다.


 당연히 진심 어린 사과는 필요하다. 정말 도덕적으로 잘못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범했을 때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먼저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분별없이 행하는 사과는 결코 건강한 마인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 스스로를 항상 가해자로 만드는 것은 최악의 일이다. 그리고 교만이다. 나의 잘못만으로 그 일이 벌어진 게 아닐 텐데... 마치 내가 잘했으면 다 괜찮았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더 많이 쓰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조금씩 실천에 옮기다 보니 엉망이었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고 있는 기분이다. 무조건 먼저 미안해한다고 해서 예의 있는 사람이 아니며 먼저 죄송하다고 해서 겸손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겸손하고 멘탈이 단단한 사람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해지고 습관적인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지구 어딘가에 오늘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을 모든 '프로 사과러'들에게 외치고 싶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절대 그대의 잘못 만이 아니라고.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작가의 이전글 위드 코로나 in 베를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