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코로나 연대기(2020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2020년 1월 14일.
우리 가족은 약 한 달여간의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베를린 테겔 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너무나 평범하고도 지극히 일상적인 날이었다.
그저 오랜 비행 뒤 여독으로 몹시 피곤했을 뿐.
입국 후 정확히 6일 후, 한국에서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름도 증상도 처음 듣는 생소한 바이러스. 이름부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기사에서는 줄줄이 '중국 우한'이 바이러스의 발생지라 보도하고 있었고,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은 아무래도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여론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2020년 1월 27일. 그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 첫 독일인 확진자가 나타났다. 쇼킹했다. 감염 경위를 뉴스 기사로 접하기 전까지는 중국과 독일이라는 두 나라 간의 연결고리를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었다. 감염의 발단은 중국 상하이에서 온 자동차 공급업체의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독일 바이에른 주(Bayern)에서 열린 회사 수련 과정에 참여하였고, 그와 함께 프로그램을 이행했던 33세의 또 다른 직원이 그만-안타깝게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말았다. 결국 33세의 독일인 직원은, 최초의 독일인 확진자로 명명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전염성이 높은 신종 바이러스는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무섭도록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월이 지나고 2월, 그리고 3월이 되자 확진자 수는 말도 못 하게 늘어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바이러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세를 몰아 전 세계를 은밀하면서도 강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3월 22일부터 5월 4일까지 첫 번째 록다운(lockdown)이 선포되었다. 록다운이 될 거라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독일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식량이며 생활필수품들을 쟁이기 시작했다. 이미 마트에는 통조림, 탈지우유, 냉동식품 등이 동이 났고 웬일인지는 몰라도 두루마리 휴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아직까지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항간에는 두루마지 휴지로 마스크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다-록다운 기간 중에는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슈퍼마켓과 드러그 스토어, 병원 정도만 문을 열었다. 오랜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업체가 정부로부터 재난 보조금을 지원받았다.-독일이 진심으로 대단해 보였던 순간이다- 가족 구성원 외 1인까지만 함께 산책할 수 있었고, 모임 인원수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심지어 코로나 발생 초기 독일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마스크 한 장을 시중에서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일은 마스크가 코로나를 예방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가족들과 지인들이 한국에서 마스크를 보내주었다. 당시 록다운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소로 출근해야만 했던 남편은 몇 개 안 되는 마스크를 돌려쓰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발생지가 중국이라 보도된 시점에서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남편을 경계했다. 상상해보라. 지하철이나 지역 열차 내, 수많은 독일인들 가운데 독보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있는 동양인 남자라니. 사실 그 자체로도 사람들은 남편을 피하기 바빴고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을 해댔다. 어떤 지인은 지하철 플랫폼에서 대놓고 욕설을 들은 적도 있다 했다.
그렇게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나는 세 달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단 둘이 집에서 보내야 했는데 -한국에서도 이런 문제로 고충을 겪은 부모들이 많음을 익히 알고 있다- 유치원에서 보내준 일주일 치 교육 프로그램들로도 그 많은 시간을 보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나도 아이도 지쳐갈 무렵, 독일 정부는 아동 보육기관에 '긴급 보육' 시스템 시행 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부모가 보내고 싶다고 아이를 다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사회 필수 시스템에 관련된 업종'의 부모들만 아이들을 유치원에 맡길 수 있었고, A4용지로 수 십장에 달하는 공문 속 직업군에는 내가 속할 곳이 없었다. 아쉽게도 '예술가' 카테고리는 국가의 기본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직종에 속하지 못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집 근처를 산책하다 우연히, 굳게 문이 닫힌 작은 갤러리를 본 적이 있다. 그 갤러리 유리창 위에 붙어있던 글귀는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Kunst ist systemrelevant!! (예술은 (국가)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부분적인 록다운은 계속되었다. 교육시설들만 부분적으로 문을 열었을 뿐, 레스토랑이나 상점들은 여전히 록다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레스토랑과 카페에서는 주문한 메뉴를 픽업하는 것만 가능해졌고, 상점들은 온라인 예약 후 시간 내 방문만이 가능했다. 꿈쩍 않을 것 같던 독일인들도 서서히 너나 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고, 급기야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실내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라는 명목 아래에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여전히 마스크가 코로나를 막아줄 수 없다고 믿었으며 인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정부의 조작과 사실 은폐에서 비롯된다는 음모론을 신봉했다. 이 같은 신념을 가진 독일 전 지역 사람들이 베를린에 모여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베를린 중심에 위치한 대로를 막고 몇 천명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빡빡하게 공간을 채워댔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거리 유지 없이 거리를 가득 매운 그들이 무척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합법적인 절차로 모인 데모 부대였기에 정부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날의 기사 사진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해방감을 누리며 들뜬 얼굴들로 웃고 있었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듯 당당한 눈빛과 세상을 이긴 듯한 환한 미소. 그러나 오랜 외침과 행진 후 마음 한편에 남았을 답답함 또는 혼란의 감정이 예상되어서였을까. 미안하지만, 그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2020년 겨울은 베를린에 사는 이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들이 일 년 내내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마켓(Weihnachtsmarkt/바이나흐츠맠트)이 최초로 열리지 못한 해였기 때문이다. 서서히 코끝이 시려오는 계절이 다가오자 크리스마스 마켓의 개장 여부는 당연히 '뜨거운 감자'였다. 오랜 논의와 회의 끝에,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정부는 크리스마스 마켓 전면 취소를 선언했다.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과 마켓에서 짭짤한 수익을 냈던 상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좁은 마켓 사이를 수많은 인파가 지나다니며 음식을 먹고 물건을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매년 12월이면 집 근처 성 뜰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섰고 밤늦게까지 반짝이는 불빛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는데, 유난히 그 해 겨울은 참 쓸쓸했다.
코로나 팬데믹 안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그저 달력의 12라는 숫자가 다시 1로 바뀐다는 것 외에 큰 감흥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안에 머물러 있었다. 길고 지루한 책의 첫 번째 챕터를 겨우 읽고 나니 보다 지독한 두 번째 챕터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랄까? 그래도 전 세계가 힘을 모아 단시간 내에 '백신'을 만들어냈다는 쾌재가 있었고, 노령자 및 고위험자, 특정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교육 및 행정)에게 백신의 우선권이 주어졌다. 동시에 코로나 간이/PCR 검사소(Corona schnelltest/ PCR Test : 코로나 슈넬 테스트/피씨 알 테스트)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행 초반에는 성인 한 사람당 일주일에 한 번 무료 검사권이 주어졌고 두 번째 검사부터는 20유로에서 40유로 이상의 요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별 진료소의 장려 정책으로 인해 한 사람이 몇 번을 검사하든 상관없이 무료로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폐점한 가게들을 빌려 검사소를 만들기도 하고, 수레 같은 곳에 싣고 다니는 이동식 검사소도 생겨났다. 지금도 어디든 넓은 공터가 있다면 어김없이 코로나 검사소가 세워지고 있고 길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한국의 편의점처럼 말이다.
" 나는 절대 백신 접종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내가 왜 단기간에 만들어진, 믿을 수도 없는, 그 인위적인 약물을 내 몸에 넣어야만 하는지 모르겠어. 그 결과를 누가 책임질 건데?
사람은 길 가다가도 자동차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거야. 코로나에 걸려서 잘못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약물을 내 몸에 넣는 것 또한 코로나에 걸리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라고 생각해."
이웃집 H는 의사이다.-지금은 진료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처럼 백신 접종을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의 의견에 일부 동의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얼버무렸지만 결국 6월 말, 2차 접종까지 마치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는 정체모를 약물을 몸속에 집어넣은 내가 퍽 안쓰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는 점차 접종자와 비접종자로 편 갈음하며 접종자 혹은 완치자만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가령 다른 나라로의 여행, 실내에서 열리는 행사 참여, 영화나 음악회 및 전시회 관람,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스포츠 수업 등록부터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는 것, 식당이나 카페의 실내에 앉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비접종자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전혀 없다. 비접종자가 이러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딱 24시간 동안 유효한 간이 테스트 음성 결과를 필요로 하며 이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의 구 테겔공항(Tegelflughafen/테겔플룩하펜)은 이미 백신 센터로 탈바꿈했고, 최근에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일일이 접종을 권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길가에 세워져 있는 백신 접종 버스도 목격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젊은 층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 현 독일의 접종 완료율은 66.6%에 그치고 있다.
'자유'와 '의무' 사이에서의 갈등은 늘 필연적이면서도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상상 이상의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던 베를린은 근 2년 사이 몰라보게 바뀌었다. 서면으로만 가능했던 업무들이 점차 인터넷 상에서도 가능해지고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음식 배달, 식료품 배달 등이 자연스러워졌다. 집 현관문 앞까지 식료품을 배달해주는 어플도 생겼는데 주문한 지 10분 안에 도착을 못하면 배달비를 아예 받지 않는다고 하니, 베를린에서는 이 조차도 놀라 기절초풍할 일이다. 베를린 촌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가을방학 기간이 끝나자 독일의 코로나 확진자는 다시금 급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아이의 유치원에서도 확진자가 -그것도 무증상- 종종 나오고 있고 마스크, PCR test, 코로나 자가 테스트와 함께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자가 격리란 내게 이제 너무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 마지막 한국 방문 당시 탑승했던 비행기 안에도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가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끔 소름이 돋는다. 언제까지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계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수많은 생명들과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늘 마음 깊은 곳이 저릿해지고 세상 무거운 돌덩이가 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진다. 동시에 남의 일이 아니라는 두려움과 함께 깊은 불안도 찾아온다.
전 세계가 하나의 이슈로 복잡하게 얽혀 지내온 시간이 어느덧 만 2년이 다 되어간다. 이 크고 넓은 지구를 한 번에 뒤덮었음에도, 정작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작은 것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는 날, 그날엔 답답한 마스크 따위는 벗어던지고 서로의 빛나는 눈, 코, 입을 찬찬히 살펴보며 평범한 대화 한마디 나누고 싶은 간절함이 있다.
그 특별한 일상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변함없이- 마스크 한 개를 챙겨 씁쓸히 집을 나선다.
* 바이안 주(Bayern) : 독일 남동부에 있는 연방주, 주요 도시는 뮌헨(München), 뉘른베르크(Nürenberg),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가 있음, 위키피디아(wikipedia)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