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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훈 Jul 21. 2018

살아있는 바보

이른 아침, 

강의를 들으러 아침도 굶은 채 광역버스를 타는 나의 방학. '15분만 일찍 움직이면 아침도 먹고 갈 텐데...'
아침의 나는 이 간단한 이치를 매일 잊고 산다. 집을 나와 공복의 배를 움켜쥐고는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아침을 먹을 테야. '라고 다짐하는 것만큼은 꾸준하다. 이런 면에서 나란 사람은 참 규칙적이라고 봐도 될 테지.

환승을 하고 다른 버스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도중 경쾌한 스크래치 소리가 버스 뒤편에서 들려온다. 멈춘 버스. 어리둥절한 승객들. 짜증을 싣고 뒤에서 들려오는 경적소리들. 상황을 보자니 출근 중이던 승용차가 버스와 가벼운 접촉사고를 낸 것 같다.

덕분에 버스에서 내려 다음 광역버스가 올 때까지 도로변 구석에서 몇몇 사람들과 멀뚱멀뚱 서있기를 20분.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숨 막혀오는 더운 공기 위에서. 기사님 말대로 기다리다 다음 광역버스를 군말 없이 탔건만 원래 탔던 버스와는 조금 노선이 다르다. 에효. 결국 나는 평소보다 1시간이 더 걸려서야 강의실에 도착했다.

만약 내가 환승할 때 1분 뒤에 오는 다른 버스를 탔다면 제시간에 일찍 도착했을 텐데. 사고를 낸 승용차 주인을 탓해야 하나? 그 사람은 오늘 아침 평소보다 피곤해서 그랬을까? 그랬다면 그 사람은 왜 피곤했을까? 급한 일을 마무리하는 와중에도 밀린 웹툰을 보고 자느라? 아니면 검색하다 우연히 내 블로그에 들어와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그럼 블로그에 글을 써둔 내 잘못인 건가? 이게 무슨 망상인가 싶겠지만 저 사람이 내 블로그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무의식 중에. 사고를 내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사실 보기에 귀여웠거든. 어쨌든 돌고 돌아 내 잘못이라면 세상 일은 역시 돌고 도는 거구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과 부질없는 생각들. 스스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변덕스러운 내 안의 것들. 이처럼 생각과 감정은 물감 퍼지듯 다채롭게 떠올라 모순적이게도 한순간에 휘리릭 사라진다. 또 생각 나무에서 한 가지가 예고도 없이 불쑥 자라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며칠 전에 그냥 다시 보고 싶어서 본 [이터널 선샤인]의 한 대사다.

갑자기 다행이라 중얼거렸다. 망각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날아가는 것들이 두려워 순간을 기록하는 나는 그러면 얼마나 멍청한가. 기사 아저씨 말만 믿고 노선이 조금 다른 버스를 확인도 안 하고 탄 나는 멍청한 게 맞지. 세상의 변화를 원하면서 불변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는 멍청한 게 맞지. 담는 순간 선명해진다는 내 말은 어쩌면 두려움을 감추고자 하는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털어버리고 강의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배가 한 번 더 신호를 보낸다. '그래, 기왕 늦은 거 나가서 김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자.'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참치김밥 한 줄을 호방하게 주문했다. 김밥이 나오자마자 바로 한 입. 우적우적. 여기 김밥은 우리 동네 참치김밥보다 별로다. 내 입맛이 우리 동네 분식집에 익숙해져서일까? 그렇지만 김밥에 참치가 너무 적은걸. 

몇 조각을 먹고 나서야 투박하게 잘린 김밥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밥의 크기가 제각각이다. 어떤 건 지나치게 얇고 어떤 건 매우 두껍다. 우리 동네는 김밥 한 줄도 기계로 자르는데, 여기는 순간순간 아주머니의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인 김밥 조각들이 만들어 지나보다. 갑자기 이곳이 좋아졌다. 정겨운 마음으로 가볍게 수업을 들으러 간다.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올려다본 창밖의 하늘.

색감이 어찌나 예쁘던지 입 밖으로 우와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나 바보같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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