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5 새소년 - 난춘(亂春)
안녕하세요. 수플레 영훈입니다. 오늘은 도서관 가는 길에 자전거를 탔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더라고요. 여전히 마스크를 쓰는 일상은 계속되고 있지만 어느덧 봄의 끝자락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요즘 시기에 적절한 제목을 가진 노래를 소개하려고 해요. 바로 새소년의 난춘(亂春)입니다. 난춘은 어지러운 봄이라는 뜻인데요. 노래와 연관 지어 한번쯤은 꺼내보고싶던 솔직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평소에 저는 라디오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으로 수플레 글을 써왔는데요. 오늘은 일기 쓰듯이 쓰는 게 이 글과 더 어울릴 것 같아 편하게 글을 써보려 합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나는 새소년의 보컬 황소윤을 좋아한다. 좋아함에 있어서 정도를 측정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어필을 해보자면 공식 발매가 없던 소윤님의 10대 시절 한정판 데모 앨범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젠더의 경계라는 것이 무색하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해내는 대담함, 거창한 계획은 없고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목표라 말하는 유연함, 철학적이고 시적인 가사, 밴드 사운드에서 느껴지는 아이덴티티, 진정성. 새소년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이런 음악을 만들어내는 소윤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발매된 난춘을 들었을 때의 내 마음이 특히 그랬다. 마침 계절에 대한 소설을 쓰는 중이었는데 봄의 보편적인 속성을 떠나 자신만의 느낌으로 어지러운 봄을 표현하는 그가 멋졌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 2명 앞에서 난춘을 정성스럽게 불러주는 새소년이 담긴 유튜브 영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눈물이 나기도 했다. 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 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황소윤이 그렇게 읊조릴 때에 나는 어떠한 온기를 느꼈던 것 같다. 난춘을 반복해 들으며 그 온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를 곱씹다보니 '마주하는 용기'로부터오는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TLexEOcGV4
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체로 밝은 것들을 떠올린다. 새싹, 푸르름, 새로운 시작, 피어남, 포근해진 날씨.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의 봄은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시간이 흘러 봄은 왔는데 내 마음은 봄이 아닐 때 우리가 겪는 헛헛한 마음들이 분명히 봄의 어딘가에 존재한다. 우리는 내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되질 않아서, 우선순위에 밀려서, 타인의 시선이 겁나서, 새까만 마음을 꺼내보기가 두려워서, 혹은 삶 자체가 너무나도 권태로워져서 밝지만은 않은 그 봄을 밝은 채로 내버려 두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봄이 있다. 바로 아버지. 지금껏 나의 봄을 그려올 때 그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뭐랄까 봄과 아버지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면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먼 거리일 것만 같다. 하지만 봄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요즘의 나는 봄에서 아버지를 자꾸만 떠올린다. 아버지가 내게 선물했던 봄에 대하여, 더 거슬러 아버지의 봄에 대하여.
나는 황소윤은 닮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은 언젠가부터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이었으니까.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나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술을 마시면 무서운 사람이 되기도 했으니까. 내가 클수록 점점 더 보수적이고 시시한 사람이 되어갔으니까. 그러던 내가 최근에서야 조금씩 알게 된 것이 있다. 한 때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영웅이었던 사람에게 실망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 사람처럼 늙어가고 있다는 뜻임을.
어릴 때 처음으로 인터넷 세상에 발을 들이던 날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의 첫 메일 아이디는 너무나도 정직했다. lyh9310. 이영훈 93년 10월생. 아버지는 내가 메일을 주고받는 것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끔씩 회사에서 메일을 보내주곤 했다. 메일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질 않지만 어떠한 제목이 불현듯 떠오른 날이 있다. 제목은 배추벌레와 흰나비의 이야기. 날 수 있는 나비를 부러워하는 배추벌레에게 나비가 건네는 위로가 담긴 동화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언젠가 나비가 될 거야라고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칭찬했던가 또 다른 이야기를 보내주었던가. 이제는 흐릿해져 버린 기억이지만 메일을 통해 전해지던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내게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이디를 만들어주고 메일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그런 다정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엄마에게 들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시던 할아버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의 극단에 있었던 그 시절의 할아버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까.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아래서 자랐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걸 수도 있겠다. 아버지가 평소 하는 말이나 행동에서 요즘의 젠더 감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술을 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하던 날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선에서 보여줄 수 있는 나름의 변화를 실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친구 대 친구로서 나를 놀아주던 시절, 메일에 이야기를 고르고 담아 보내는 마음을 떠올리면. 할아버지가 지어준 아버지 이름의 뜻은 '이기는 남자'다. 아버지는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이기기만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참아 왔을까. 허락되지 못해 흐르지 못한 눈물이 안쪽으로 얼마나 고여있을까. 받지 못했던 다정함을 나에게 주기 위해 마음을 얼마나 내어주어야만 했을까. 아버지가 가부장적이라서 저질렀던 모든 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슬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준 사람이 맞다. 세상에 유심히 들여봐야 할 대상이 얼마나 많은데 기득권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냐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단지 나는 '가부장적이라서 당신이 미워요.'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는 복합적인 세상에 아버지와 함께 서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평생을 살아도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시절에 대하여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그 아득한 시절을 더듬어보는 게 전부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시도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잊고 있던 나의 봄을 만났다.
최근 김신식 감정 사회학자가 쓴 <다소 곤란한 감정>이라는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공감과 소통이 중요하다 여겨지는 시대에서 아버지는 이제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더 멀어질까. 감정의 세세한 결을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던 특권을 누리던 당신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떨어질까. 언젠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내게 툭 꺼낸 말이 있다. "영훈아, 나는 너를 따라가기 힘들 때가 있어." 예전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바깥으로 시선을 돌릴수록 아버지는 그런 나와 닿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오고 있던 것일지도.
나의 아버지는 내가 울 때마다 남자는 울면 안 돼라고 말하는 뻔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히든 피겨스> 같은 여성 서사 영화를 보며 눈물을 몰래 훔치던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만약 아버지로 태어났다면, 아버지가 지금의 나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할까. 감정을 느끼는 것에도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해볼 수 있는 일도 있지 않을까. 독서모임에서 감정 격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몸이 아프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소통하기 위해 병실에 어른 동화책을 가져다 놓았다는 형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지금껏 나는 불만만 늘어놓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버지에게 동화책을 선물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할 것만 같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지금의 관계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으니까. 아버지는 라라 랜드의 감정선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고 나는 라라 랜드의 결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멀어지고 있는 아버지와 나 사이를 떠올리면 나는 무엇이라도 해봐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든다. 다행히도 내게는 당신이 선물한 어제의 봄이 있다. 나는 그 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알아갈 용기를 얻는다. 우리 사이가 아무리 멀더라도 그곳에 당신이 여전히 있음을 알았으니 좀 더 부딪혀보고 싶다. 나 역시도 어렵지만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znX5j2oQ0
난춘에서는 말한다. 내가 너의 작은 심장에 귀 기울일 때에, 입을 꼭 맞추어 어제에 도착했습니다. 배추벌레는 어제에 머물러 있던 흰나비에게 잠시 돌아왔다. 배추벌레는 나비의 심장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비도 배추벌레였던 시절이 있음을 깨닫는다. 영겁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흰나비를 안고 배추벌레는 비로소 나비가 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로 날아간다.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구독과 공감, 댓글은 더 좋은 매거진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매주 수요일 '수플레'를 기다려주세요! (비슷한 감성의 음악 공유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