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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Jun 03. 2020

여름날의 빗 속을 좋아하세요?

ep.16 Lasse Lindh_C'mon Through


제일 좋아하는 계절인 여름이 시작되는 6월입니다.


한 해의 절반쯤 왔을 때 종종 '올해는 왜 이렇게 밋밋하지?'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도 '여름이 되면 재밌는 일들이 일어날 거야. 늘 그랬으니까!'같은 생각으로 하반기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합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거리가 초록빛으로 물들고 콧등에는 땀이 맺히고 옷차림이 가볍고 알록달록 해지는 계절이 시작되면 꼭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어요. 특히 올해는 조금 더 그 주문을 많이 걸었던 것 같아요.


'여름이 오면 다 괜찮아질 거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야. 늘 그랬으니까!'



여름이 되면 자연스럽게 '비 내리는 풍경'이 떠오릅니다. 여름을 기다리는 것도 아마 비 오는 여름날의 장면이 보고파서겠지요.





6월의 첫 번째 수플레는 비가 오는 날이면 무조건 플레이리스트를 차지하는 TOP10 중 한 곡을 가져왔습니다.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르는) 2006년작 ‘소울메이트'라는 드라마 ost인 'C'mon through'라는 곡입니다. 감성 넘치던 열여섯의 소녀는 노래가 시작하는 첫마디부터 가슴이 쿵쿵하고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소울메이트(2006)


힘들어서 길가 벤치에 앉아 엉엉 우는 여자 주인공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와 무작정 귀에 이어폰을 꽂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본 여자의 귀에 들린 노래가 'C'mon through'였지요. 드라마 속 세상에는 유독 초록색이 많았고 비도 많이 내렸고 그래서 더 청춘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꼭 여름날 빗 속에서 듣고 싶어 집니다.



 It ain't so easy to love you true,  

account of all the rattlesnakes  

and all that makes you blue

당신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쉽지 않아요.

But it's worth it I love the thrill  

그러나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내게 가치 있는 일이에요.

내가 이 전율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Come come come  

자 어서 빨리

C'mon through c'mon you come  

dig right into my heart  

내게로 와서 내 마음을 파헤쳐 줘요.



그 당시 제목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고 (커몬? 커믄?) 가사 역시 해석하지 못했지만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Lasse Lindh의 깊숙하게 잠긴듯한 목소리에서 밀려 나오는 애절함과 멜로디의 울림이 충격적으로 좋았었거든요. 비 오는 날 베란다에 턱을 괴고 서서 이 노래를 들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여름의 빗 속을 좋아하세요?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던 중학생 시절, 비 내리는 여름날의 약간 쌀쌀하고 흐릿한 느낌을 정말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지만 비 내리는 고향 동네를 볼 때의 감동에 도시의 풍경은 비할 게 아닐 것 같다.


스무 살 전까지 살던 고향 동네는 제법 시골이어서, 비가 내리면 세상이 온통 빗방울 소리와 개구리 소리로 가득 뒤덮였다. 집 앞에 펼쳐져 있는 넓은 연두색 논은 호수처럼 출렁거렸고 베란다로 고개만 내밀어도 비 냄새, 이끼 냄새가 물씬 났다. 감기 걸린다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면 몸을 겨우 가릴만한 작은 우산을 쓴 채 물웅덩이가 가득한 논길을 걷거나 초등학교 담장 아래에 앉아서 비 오는 걸 바라보곤 했다. 비와 함께 한 추억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소나기에 나오는 시골 소년, 소녀들처럼 촌스러운 교복을 입고 비에 축축이 머리를 적신채 몰려다니던 기억 속에는 비 내리는 장면이 참 많이 심어져 있다. 떠올려 보니 특별한 순간들에는 정말로 항상 비가 왔구나.




언제부터 이렇게 비가 좋았는지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여행을 많이 다녔던 우리 가족은 움직이기만 하면 늘 비가 왔다. 모처럼 여행을 갔는데 비가 오면 망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지만 여행을 자주 다녀서 그런지 우린 오히려 비가 올 때 색다른 장면들이 쌓이는 게 좋았다. 그리고 빗 속에서도 잘 노는 방법을 터득해가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 비가 내리면 돗자리를 우산 대신 쓰고 다니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가 돗자리의 양 쪽 끝을 나란히 잡고 머리 위로 들면 아직 머리가 닿을 만큼 크지 못한 두 딸은 돗자리 우산 아래에서 신나게 걸었다. 가랑비 정도가 아닌 폭우가 쏟아져 바닷가 천막 아래 고립되던 그날도 우리는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모래 위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쏟아지는 비를 보았다.


"우리 엄마가 용띠라서 우리 가족은 어딜 갈 때마다 비가 와"

마치 비의 정령이라도 된 듯 이야길 하던 촉촉하고 행복한 추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어서인지 비 오는 날만 되면 기분도 덩달아 촉촉해진다. 그리고 고향의 초록색 물결이 떠오르며 그 여름의 빗 속으로 달려가고 싶어 진다.


고향에 가면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을 언젠가의 어느 하루에 비 내리는 동네를 걷고 있을 내 모습도 떠올려 본다. 조금, 아니 많이 슬퍼진다. 물웅덩이라도 참방 밟으면 ‘엄마’하고 엉엉 울며 빗 속에 서있을 것 같다. 다 커버린 아이 둘이 있는 엄마가 되어서도 말이다. 그리고 비만 오면 그곳의 개구리 소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 같다. 아무도 남지 않고 이미 변할 대로 변해버린 시골 동네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건 빗소리와 개구리 소리, 이끼 냄새뿐일 테니.







얼마 전 '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필수 조건들'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비'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요소들이 많다고. 비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실내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 아니라 습한 이끼 냄새, 비에 젖은 축축한 신발, 정신없이 곱실거리는 악성 곱슬 머리카락까지 좋아해야 비로소 '비'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가벼운 글이었는데 왠지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래, 진짜 비를 좋아하면 빗 속에 있는 것도 즐거워야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비 오는 여름 날을 좋아하세요?'가 아닌 '여름의 빗 속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네요.



벅찬 행복을 느끼던 날도 마구잡이로 슬픔에 빠지던 날도 유독 빗 속의 기억들이 더 짙은 걸 보면 비의 정령은 힘이 꽤 센 것 같습니다. 감정을 분수처럼 쏘아 올리기도 하고 폭포처럼 깊은 곳으로 한없이 떨어지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비가 내리면 자발적으로 우산 아래로 숨어 들어가 고립된 채 짙은 감정을 더 느끼려 애쓰곤 합니다. 작은 우산 아래 몸을 숨기고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리고 그런 날 어울리는 노래 열 곡쯤 플레이리스트에 갖고 있다면, 그 작은 그늘 아래는 이미 다른 세상이 되어 있을 거예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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