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Stephanie Mills - Home
안녕하세요. 수플레 영훈입니다. 장마가 시작된 요즘,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신가요? 저는 최근 명주와 도자기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하기 전 동해바다로 조용히 여행을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혼자 뚜벅뚜벅 공기 좋은 곳을 걸으니 잊고 있던 것들이 생각나는 며칠이었습니다. 현실에 닿아 있다 보면 자꾸만 잊게 되는 것들. 오늘은 그런 것들을 상기시켜주는 저만의 무언가에 대해 꺼내볼까 합니다. Stephanie Mills의 'Home'이라는 노래와 함께요. 오늘은 픽션과 논픽션 어디쯤의 서간문을 친구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보도록 할게요:)
안녕 펭귄과 쿼카를 닮은 내 친구 펭카야. 나는 지금 파도 소리가 들리는 카페 앞에서 석류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너에게 편지를 써.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하염없이 감상할 수 있는 이 곳을, 소개해 준 너와 함께 오지 못해 아쉬워. 내가 보고 담은 것들을 너에게 전하기 위해 더 부지런하게 셔터를 누르고 글을 썼다면 나를 용서해주겠니? 내가 감각한 것들을 네가 그대로 느낄 순 없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편지를 읽고 너만의 바다여행이 또 하나 만들어질 테니 말이야.
있잖아. 서울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기 전까진 이번 여행이 실감 나지 않았어. 카메라와 수영복, 책과 노트북을 챙겨 배낭에 꾹꾹 눌러 담아 기차에 탔을 때, 그리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본 곳으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전화를 받았을 때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았어. 일하기 전 혼자만의 달콤한 여행이라니. 그 어느 때보다도 허송세월의 2박 3일을 보내야겠다 다짐한 순간이었어. 점점 녹음이 가득 해지는 창 밖을 바라보다 소설을 읽었어. 소설을 읽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생각해보면 나는 무언갈 많이 말하고 싶은데, 그걸 말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소설이 좋아서 소설 창작 강의를 들으러 다녔던 것 같기도 해. 정성스러운 픽션 속에 사실은 정말로 내가 하고 싶던 이야기를 툭 던져놓을 수 있는 게 소설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보면 비겁하기도 하고 영악하기도 한 거지. 하지만 누구나 조금씩은 비겁하고 영악하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너그러운 펭카가 이해해주길 바라.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너에게 말한 뒤로 너는 무얼 했더라. 내가 읽고 싶다던 책을 선물하고 누구보다 나의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줬지. 든든하고 고마웠어. 네가 선물한 책이 이미 내 서재에 있다는 것은 너는 지금까지 몰랐겠지만, 나는 가끔 서재에서 그 2권의 책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며 피식피식 웃곤 해. 네가 내게 책을 선물하는 마음, 내가 소설을 쓰려는 마음. 그것들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봤어. 뭐 이 곳이 면접장이고 비즈니스의 장이라면 그럴듯한 이유를 번호 매겨가며 똑 부러지게 말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정말로 그 마음을 온전하게 알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왜 사는지도 아직 잘 모르겠거든. 지구에 왜 태어났고 어쩌다 너를 만났고 무슨 필연이나 우연으로 지금 동해바다 앞에 서있는 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수년 전에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이해하기도 하는 게 인간인데, 그 이해가 또 엎어지고 죽을 때까지 정답을 모르는 게 우린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동해에 도착했어. 미니멀리스트 인척 하는 맥시멈리스트는 도라에몽 가방마냥 다양한 물건을 담은 배낭을 메고 해변가를 따라 툭툭 걷기 시작했어. 햇빛은 뜨겁고 배낭은 무거워 숙소까지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걷고 싶더라. 적당히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 바람이 내 몸을 감쌀 때 자꾸만 콧노래가 나오더라고. 배낭을 메고 한참을 걷다 보니 그 날의 감각이 생각났어. 지구 반대편에서 배낭을 메고 행군하듯 걷고 걷던 그 날들. 24살에 남미 배낭여행을 떠나던 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그곳엔 답이 있을 거다. 나는 그곳에서 정답을 찾을 거다. 그때의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거든. 그 날의 나를 떠올리면 우리 집 강아지 별이가 본가에서 날 만나러 서울로 오겠다고 무턱대고 나서는 것만 같달까. 물론 나는 그 여행에서 정답을 찾을 수 없었어. 애초에 그곳에 정답 같은 건 없었으니까. 거기서 정답을 찾을 수 있던 나라면 사실 굳이 떠나지 않아도 정답을 알았을 거야. 물론 지금의 나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 어쩌면 살아갈수록 확신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질 뿐이더라고. 하지만 동해바다를 따라 계속 걷다 보니 문뜩 깨달은 게 하나 있어. 배낭을 메고 굳이 걷고 걸을 때에만 느낄 수 있고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이방인의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할 때만 보이는 것들. 그게 무엇인지 굳이 글자로 적어 내려가고 싶진 않아. 대신 그날의 풍경을 너에게 몇 장 담아 보내. 내 망막과 렌즈를 거친 동해바다를 보며 너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바라며.
https://www.youtube.com/watch?v=cnKQN7TF4hQ
아. 사진들을 보며 네가 함께 들었으면 하는 노래도 하나 추천해줄게. 'Stephanie Mills - Home'이야.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넷플릭스 <포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블랑카가 에이즈와 차별의 시선으로 죽어가는 병동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부터야. 가사 하나하나와 드라마의 감정선이 합쳐서 듣다 울어버리고야 말았던 노랜데, 그 뒤로 스테파니 밀즈의 노래를 마구마구 찾아 듣던 기억이 나. 세월의 깊음이 느껴지는 진한 목소리로 성찰하듯 무언가를 토해내는 이 노래가 감히 아름답다고 말해볼게. 이 노래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질 가사를 담지 않았을까 싶어. 미래를 살아본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예감이 드는 노래야.
Livin here in this brand new world Might be a fantasy
이 새로운 세계는 환상일지도 몰라
But its taught me to love
하지만 사랑을 가르쳐줬네
And its real, its so real, its real to me
그러니 진짜야 나에겐 생생한 진짜라네
And ive learned that we must look Inside our hearts to find
그리고 난 배웠네 우리 마음을 듣고 찾아내는 법
A world full of love
사랑이 가득한 세계를
Like yours, like mine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를
Like home
바로 집을
노랫말을 들으며 사진을 잘 보았니? 펭카가 언젠가 말한 적 있지. 너는 집이 들어가기 싫다고. 집은 가장 편하고 사랑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고. 그렇기 말할 때 너의 처진 어깨를 기억해. 어떻게 하면 너를 도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의 나로선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마음이 아팠어. 그런 너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가끔 고민하곤 했었는데 새벽녘에 일어나 동해 바다 일출을 보다 조금은 고민이 해결된 거 있지! 해가 떠오르는 지평선 너머에 실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세상을 상상하다 보니 그곳으로부터 금가루가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라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크리스마스트리가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고, 은하수가 잘게 부서지는 것 같기도 했어. 그리고 그 물비늘은 어느새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더라. 세상에서 가장 사려 깊은 방식으로. 물비늘과 나만 알 수 있는 언어로.
그때 물비늘이 내게 건넸던 말을 너에게만 알려줄게.
물비늘은 말했어.
"지금 우리의 집은 여기 이곳이야."
물비늘 덕분에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말이야. 우리의 집은 영등포의 어떤 원룸이거나 도봉구의 아파트 한 호수이기도 하지만 더 넓게는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고, 깊고 넓은 바다고, 함께하는 지구이고, 광활한 우주이기도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펭카야. 우리가 있는 집을 좀 더 넓게 감각해보자. 집에서 너를 힘들게 만드는 것들은 너 방 한쪽에 쌓인 먼지 한 톨 정도라 생각해보는 거야.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바다, 우리 집에 있는 나무, 우리 집에 있는 수많은 빛들을 느껴보자. 방에서 방을 넘나들며 우리의 집이 건네는 말들을 들어보자. 여기 같은 집 아래 너를 사랑하는 수많은 존재들과 더불어 나도 함께하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 놓길 바라. 그럼 이만 줄일게. 우리 또 보자. 안녕.
- 사랑스러운 펭카에게 물비늘을 담아 -
- 이방인이자 동거인인 영훈 씀-
보내는 곳 : 우리 집
받 는 곳 : 우리 집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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