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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잠 Aug 06. 2016

기우(杞憂)

가짜 근심

    

1.

그녀는 차를 피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불행해 질 거라고 생각한다. - 그러니 그녀는 지금은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 차를 피하지 않는 것도 의도적인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마흔 해를 사는 동안 자동차에 스친 적도 없으며 당연히 사고를 당한 적은 더욱 없다. 위기의 순간은 몇 차례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잡아 끌거나 극적으로 차가 그녀를 피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스스로 당연하거나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던 불행은 그녀를 비껴갔다. 그래서 그녀는 불행하지 않았고 필연에 닿지 못했기 때문에 삶은 우연에 기댄 채로 유지되었다.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운이 없다. 그녀가 생각한 대로 삶은 방향을 잡지 않는다.

그녀는 절대로 차를 피하지 않는다. 이제는 자동차라는 걸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결코 차에 치이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운이 없는 것이다.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제법 깊은 밤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길을 잘 찾지 못하는 그녀는, 다만 언젠가 어떤 기억 속에서 이 곳에 와 본 적이 있다는 것만을 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고 있었던 길을 더듬어 왔는지, 그냥 우연히 여기에 닿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건 그녀는 여기에 왔고, 경포 호수의 둘레를 싸고 있는 산책 코스를 걷는다. 어디서 어떻게 술을 먹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차 안에서 마셨는지 이곳에 도착해서 어느 술집에 앉아 마셨는지 기억이 없다. 사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왔는지, 도착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만취해 있다. 기억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해진다. 선선하고 습한 바람이 분다. 하늘이 미치게 까맣다. 그녀는 언제고 술을 머리끝까지 먹고 중앙선에 누워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오늘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달콤한 것은 아니다. 달콤하다는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 의지해서 생각하면 그렇다. 그렇지만 꿈을 이룬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고 있는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 그것이 객관적으로 좋은 일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달콤하다. 그러니 그녀가 꿈을 이룬다면 그녀는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2.

그녀는 한 남자를 사귄 적이 있다.

그는 삐삐는 물론이고 전화조차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늘 그가 먼저 연락을 했다. 가끔 며칠 쯤 아무런 소식없이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남자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불행한 상상을 했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의 불행하거나 불행하지 않은 것들로 복잡한 머릿속에 그를 가두지 않았으면 어쩌면 그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스스로 자신의 불행이나 불행하지 않음을 겪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책감, 그런건 아니다. 그녀는 이기적이다.

그녀는 어쩌면 그를 몹시 사랑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아닌 것도 같다. 그의 불행과 그녀의 불행하지 않음을 엮어서 생각하다 보면 복잡해진다.     


3.

그녀는 불행한 상상을 한다.

오빠가 그녀에게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 올케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올케언니와 싸우고 나가서 외박을 하고는 저녁이 늦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오빠를 얼만큼 소중하게 여기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녀는 오빠가 어떤 시간을 보냈고 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상해 본다.

첫 번째 가능성은 친구집이나 여관에서 자고 바로 회사로 출근을 했고 퇴근해서 또 한 잔 걸치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정도면 꽤나 타당성이 있다. 그렇지만 너무 평범하다.

그녀에게는 불행한 상상이 필요하다. 불행은 늘 그녀를 비껴가지만 그녀의 주위사람에게는 비끼지 않는다. 그녀는 운이 나쁘다. 따라서 불행한 상상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불행은 늘 그녀를 비껴가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큰 일을 당하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불행한 상상이다. 오빠가 무슨 큰 일을 당하게 되는 상상, 그것이 처참하면 처참 할수록 그녀는 오빠의 신변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오빠를 얼만큼 소중하게 여기는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에 잠시 망설인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빠는 어떤 존재인가. 골치가 아프다.

전화벨이 울린다. 올케언니가 다시 건 것인지도 모른다. 전원을 꺼버린다.

그래, 가족이기 때문에 그녀는 오빠에 대해 최대한 불행한 상상을 하기로 결정한다. 뭐가 어려울까. 단지 불행한 상상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상상을 하는 동안 겪어야 하는 마음의 고통은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녀는 불행한 상상을 시작한다. 오빠는 어젯밤에 집을 나와서 바로 가까운 포장마차로 간다. 속상한 마음에 안주도 없이 머리끝까지 술을 마신다. 그리고 답답함을 느낀다. 어디고 트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파트 단지내로 돌아가 차를 끌고 나간다. 바다로 갈 생각이다. 오빠는 늘 답답한 일이 있으면 바다고 가곤 했다. 만취한 오빠는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오빠는 있는대로 속력을 낸다. 사고가 난다.

아니, 뭔가 어색하다.     


4.

그녀가 버스를 타고 간다. 그녀는 생각한다.

이 버스 안의 사람들은 안전하다. 늘 불행은 그녀를 비껴가기 때문에 이 버스는 사고가 날 리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짧은 다리를 건너다가 얼토당토 않게 난간을 들이받고 물 속에 처박힐 수도 있다. 세상에는 아주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돌발적으로 생기는 사건이 많다.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녀는 불행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지 않으니까.     


5.

언젠가 여름 밤에 문을 닫은 채로 선풍기를 틀고 자면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녀는 불행하지 않았고 딱히 죽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그날 밤 그녀는 문을 꽉꽉 닫아 걸고 선풍기를 강풍 연속으로 틀어서 그녀의 하체에 직접 닿게 위치시킨 후 잤다. 아침, 둔탁하게 윙윙거리는 선풍기 소리에 잠이 깼을 때, 종아리의 가려운 듯한 저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역시, 그녀는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예상한 어떤 사건도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불행하지 않으므로 불행하다.


* 사진- <타락천사>의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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