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의 맛은 녹차의 맛
<녹차의 맛>

이시이 카츠히토 / 2004

by 마음의 잠

이 영화는 '여름방학'의 이미지를 닮았다. 한가로운 여름방학의 어느 낮, 마루에 대자로 뻗어 뒹굴거리는 고요와 평안. 영화는 조용하고 한가로우며 심심할 정도로 느리다. 그리고 그 속에 한 가족이 있다.


도쿄 외곽의 조용한 마을의 작은 집에는 평범한 가족이 산다.

그들이 모이면 완성되는 여름방학의 생활계획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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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시,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 여섯 살 사치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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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에게는 고민이 있다. 자기가 어디에 있든 커다란 모습의 자신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사치코는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로, 혹은 체념한 듯한 얼굴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사치코는 여섯 살이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세상에 산다. 그녀의 세계가 작으니 그 속에 있는 그녀는 커다란 모습일 수밖에 없다. 사치코는 커다란 자신의 모습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올리기에 성공해야 한다는 외삼촌 아야노의 조언을 듣고 열심히 연습을 한다.


11시, 빛나는 하루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곧 뜨거운 정오를 맞이할 시간. 사춘기를 살고 있는 아들 하지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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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며 가족에게 속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나이. 몰려오는 새로운 감정들에 가슴 설레는 모습.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며 자신의 에너지를 확인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간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 끝없이 확장되어가는 넓고 푸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오후 2시, 아직 뜨거운 한 낮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해가 기울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문득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 외삼촌 아야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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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격정적인 감정에 휘말려 있지는 않다. 이제 이별을 견딜 만큼 성숙해지고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은 격렬했고,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격렬함이 남아 있지만 담담하고 조용하게 시간을 견디고 있다. 언젠가는 이별의 고통을 이겨낼 것이고 흔들림을 조금 더 잘 견디는 어른이 될 것이다.


6시, 해가 저물고 있다. 그렇지만 바쁜 일은 지나갔고, 생각해보면 늦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시간, 엄마 요시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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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그만두었던 애니메이터의 삶에 다시 도전한다. 그녀의 꿈은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응원 속에서 다시 찾아가는 그녀의 꿈. 늦지 않았다. 그녀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완성하고 박수를 받는다.


8시, 이제 곧 밤이 될 것이다. 그래서 찬찬히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할 시간, 아빠 노부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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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오는 최면술사다. 가끔 가족들을 상대로 최면을 걸기도 한다. 모두가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최면은 외삼촌인 아야노에게 위로가 된다. 최면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깊은 내면을 마주하게 하는 일이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하루 동안의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가족들은 모두 모여 앉아 그가 최면을 거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다.


11시, 자야 할 시간, 사람들은 각자의 따뜻한 이불속으로 스며든다. 곧 꿈이 시작될 것이다. 여기 할아버지 아키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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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는 전직 만화가였다. 정말 독특한 모습과 행동을 보여주는 그는 아직 발랄함과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직도 만화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노인이기에 다시 만화 같은 세상 속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복잡한 세상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만의 세계 속에 살 수 있다.


성숙한 얼굴을 한 여섯 살 사치코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할아버지 아키라는 그래서, 너무나 다르지만 많이 닮았다. 그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는 만화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의 시작과 끝에 서 있으므로 가장 멀지만, 또 가장 가까이 있다.


할아버지 아키라의 죽음. 슬퍼하던 가족은 아키라의 방을 둘러보다 그가 남긴 만화를 발견한다.

16.jpg 아키라가 남긴 사치코의 그림, 차올리기에 성공하고 기뻐하는 모습

거기에는 차올리기에 성공하는 사치코, 자전거 타는 하지메, 걷고 있는 요시코, 달리기 하는 노부오가 있다. 그들은 만화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만화는 그들의 모습이지만 곧 아키라의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키라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사치코는 드디어, 만화 속의 자신처럼 차올리기에 성공한다. 그러자 정말 아야노의 말처럼 커다란 자신이 사라진다. 하루는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 하루의 끝과 시작으로 연결되어있던 아키라와 사치코는 죽음과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여름방학 계획표를 살듯이, 시간을 살다 보면 사치코도 만나고 하지메도 만나고 요시코, 노부오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키라를 만날 것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살면 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나가게 하며 견뎌 낸 시간은 녹차의 맛이다. 견뎌냈으므로. 살았으므로.


리뷰를 쓰는 일은 녹차의 맛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녹차의 맛은 어떤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녹차의 맛'이라는 것이다. 녹차의 맛에 대해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녹차의 맛'이라는 설명보다 좋은 설명이 될 수는 없다. 녹차의 맛은 녹차의 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차의 맛을 알기 위해서는 설명을 들을 것이 아니라 맛을 보는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