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퀴디데스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by 키루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객관적인 역사 서술의 출발’ 같은 말은 책을 펼치기 전까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전율했던 '멜로스의 대화'가 실린 책, 그리고 어쩌면 그런 식의 글이 가득 실려 있을 책. 그 정도의 의미였다.

본디 나란 사람은 주변에서 백 번 천 번 추천을 하든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솔직히 책의 첫인상은 부정적이었다. 좋은 글을 쓴 작가를 만나보니 지나치게 학술적인 사람을 만난 기분? 그런데 초반의 한 부분이 이 책을 완독 할 결심을 갖게 했다.


내가 기술한 역사에는 설화가 없어서 듣기에는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에 관해 명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 역사 기술을 유용하게 여길 것이다.
이 책은 대중의 취미에 영합하여 일회용 즐길 거리로 쓴 것이 아니라 영구 장서용으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인기나 재미보다는 인류를 위해 썼다는 건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고평가 하는 거 아니야? 반골기질이 치솟았지만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제목인 전쟁사보다는, 중간에 나오는 연설문들에 더 집중했다.

그 시절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 적은 게 아니다. 투퀴디데스가 본질만 남기도록 각색하여 기록했다.


연합의 지도자가 되어 보니, 우리는 제국을 이루고 싶었다.
두려움이, 체면이, 이익이 우리에게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할 일을 당하는 거다.


이런 말들을 여과 없이 뱉어 낸다. 대의명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희망에 매달리는 자를 어리석다고 단언한다. 외교적 수사를 걷어낸 민낯은 소름이 끼쳤다.

국가 간이 아니라 사람 간에도 저런 식으로 대화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근데 틀린 말은 아니네...' 딱 이 느낌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그저 옛날에 있던 일이 아니다. 그걸 이루는 사람이 변하지 않았듯이 국가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뉴스를 틀면 이 책의 내용이 펼쳐진다.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듯이 힘을 휘두르는 나라들.

모든 것이 같지는 않다. 하지만 누군가 금기를 깨는 순간 모두가 애써 주머니에 숨겨 두었던 야만은 송곳처럼 튀어나올 거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아 고개를 들었을 때, 투퀴디데스는 내 앞에 살아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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