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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Nov 03. 2024

빠른 80입니다 : 끄적인 흔적

타인 돌봄의 시작

“딸, 일어나서 밥 먹어.”

"요즘 그 친구와는 어때? “

“수행평가 준비는 잘 되고 있니?”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입시에 대한 소통, 사춘기 감정 어루만지기 등 유아기 때와는 다른 종류의 돌봄이 필요하다.


2009년 산부인과 의사가 2월 셋째 주로 날을 잡자고 하였다. 초산이라 그런지 예정일이 지나도 아기가 나올 기미가 없어 유도분만일을 정한 것이다. 입덧으로 물만 먹어도 토한 몇 달을 견디며 앞으로 내 사전에 임신은 절대 없을 거라 결심했다. 그래도 아침 먹고 병원 가서 바로 아이 낳고 병원 점심밥까지 먹었으니 임신은 아니어도 출산은 체질인 듯싶기도 하다.


품고 있던 아기가 나의 몸으로부터 떨어지니 시원하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한 몸에 같이 있던 원초적 유대감이 사라져서였을까. 출산 후 도착한 조리원에서 조심스럽게 딸을 안아 얼굴을 마주하고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유대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그 순간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출산 후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장면은 내 품에서 내 목소리를 듣는 아기의 모습이다. 딸을 안고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줄 때 우리 둘만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온몸으로 나의 사랑을 원하는 나약한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행복감도 밀려왔다.


그때는 내 소유물이 아닌 존중해야 할 독립된 인격체임을 마음에 두고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이 초심이 자주 지켜지지 않는다. 딸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참견을 하고 잔소리를 한다. 내 기준으로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된다.


딸이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나만을 돌보던 삶에서 타인을 돌보는 삶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아이의 건강을 생각하며 좋은 식재료를 사서 함께 먹고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돌아본다. 딸과 함께할 미래를 생각하며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타자 돌봄이 나 스스로에 대한 돌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딸아이에게 섭섭함을 느낄 때 처음 만났을 때의 초심을 기억해야겠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그 눈 맞춤의 기억으로 충분하니 많은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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