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적을 놓아주기
과거와의 화해는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흔적을 놓아줌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미움이 떠난 자리에 그리움이 옅게 남고, 원망이 떠난 자리에 연민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비워진 자리에는, 나의 아이를 향한, 남편을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흔적은 이제 지나온 길 위에 남은 희미한 발자국일 뿐이다.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나의 흔적을 이루고 또 흔들었던 이들에게 짧은 편지를 띄웁니다. 지금의 내가 건네는 진심입니다.
엄마에게
엄마. 나는 서른네 해 동안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옆에 두고 자살한 무책임한 사람이었고, 당신이 남긴 거대한 공허를 메우기 위해 나는 평생을 헤맸습니다. 당신의 딸이 아닌, 당신의 '흔적'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을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바라보려 합니다. 스물 남짓의 당신이 무책임한 남편 곁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 어떤 어둠이 당신을 잠식해 갔을지, 서른네 살의 내가 되어 비로소 헤아려 봅니다. 당신은 가해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신 역시, 당신만의 흔적에 갇혀버린 또 한 명의 피해자였을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선택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쓸 수는 있습니다. 엄마,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독한 미움과 증오는 이제 놓아주려 합니다. 그것이 서른네 살의 내가, 당신의 딸인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애도이자, 나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늙은 몸을 이끌고 목욕탕 카운터를 지키며 손녀를 위해 돈을 버시던 두 분의 뒷모습이 얼마나 애틋하고 고마운지, 철없던 저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두 분의 모습이 부끄러워 목욕탕 앞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돌아가곤 했어요. 이제야 그 모든 수고와 희생이 저를 살게 했다는 걸 압니다.
그 주름진 손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여기에 없었을 겁니다. 두 분의 그늘 아래서 저는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세상 전부였던 두 분께 온전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 사랑의 빚을, 이제 제 아이에게 온 마음으로 갚으며 살겠습니다. 저를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아빠에게
당신은 늘 제 삶의 가장 큰 물음표였습니다. 원망도,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모두 지났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빈자리로 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삶을 나의 삶과 분리하여 바라볼 뿐입니다. 부디 하늘에서는 평안하시길...
나를 스쳐간 흔적들에게
엄마의 죽음 이후, 나를 둘러쌌던 어른들의 세계는 침묵으로 가득했습니다. 슬픔을 방관했던 조부모님, 나의 불안을 눈치채지 못했던 가족들. 나는 그들의 무심함 속에서 두 번 버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서투름을 봅니다. 그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들은 트라우마를 보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것만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었을 겁니다. 그들의 침묵은 무심함이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깊은 무력감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주길 바랐던 기대를 놓아줍니다. 그들이 채워주지 못한 결핍에 대한 원망도 놓아줍니다. 그들은 그들의 최선을 다했고,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습니다. 그걸로 된 것입니다.
나의 작은 아이에게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 너만의 방식으로 가정을 꾸리겠다는 너의 소망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너의 모든 노력과 선택이 그 증거다. 너는 깊은 흔적 속에서 온기를 창조했고, 사랑 없던 곳에서 사랑을 피워냈다. 정말 잘했다. 그리고 정말 잘 해내고 있다. 이제는 그 흔적을 내려놓고, 너 자신이 창조한 평온함 속에서 쉬어도 괜찮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하겠다. 너는 안전하다. 너는 사랑받고 있다. 바로 너 자신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