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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실컨설턴트 Mar 13. 2023

회장님이 최신 아이폰을 쓰는 이유

사용자의 입장에서...

"저거 보여?"

선배의 손끝이 가르치는 곳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지하철의 표지판이 있었어요. 어떻게 봐도 특별할 것 없는 '잠실나루'라 적힌 평범한.

그냥 표지판 아니에요?"

보기에 따라…"

뭔가 찾아보라 재촉하는 정적이 잠시 흘렀습니다. 그리고 선배는 이렇게 덧붙였어요. ‘드디어 읽는 사람이 발음하는 대로, 들리는 대로 표기가 되었다. 그러고는 영문 표기를 자세히 보라고 했습니다.

'Jamsillaru'.

"뭐가 이상한데요?"

" 'n''l'로 바뀌었잖아.“


외국인의 입장에서 발음한다면...

그제야 보였습니다. 'Jamsilnaru'가 아니라 'Jamsillaru'이더군요. 얼마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중음악 편집하는 이야기였어요. 좋은 소리를 만들려면 좋은 장비가 필요하잖아요. 악기도 스피커도 엄청 비싸고 좋은 걸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비싼 장비들로 가득한 편집실에서 숨소리, 미세한 소리 한 자락까지 신경 쓰며 편집을 마치고 최종 테스트를 할 때에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스피커로 들어본다는 거예요. 싸구려 스피커로 들어도 좋은 음악이어야 진짜 좋은 음악이라는 거죠. 원음을 생생히 재현하는 고음질이 아니라 대중이 듣는 저음질이 진짜라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 대중음악을 접하는 환경이 음악 감상에 최적화된 건 아니잖아요. 노트북 스피커로 듣거나 스마트폰 스피커로 듣고 스마트폰 패키지에 들어 있는 번들 이어폰으로 듣고, 카페나 술집에서 웅성웅성하는 소음 사이로 듣죠.

프로그래머로 처음 회사라는 곳에 들어왔을 때, 한 선배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가장 저사양의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

그때는 썩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신형 컴퓨터가 나오면 팀장부터 바꾸고 줄줄이 내리 사랑하던 시절이었거든요. 아마도 후배에게 가장 나쁜 컴퓨터를 주는 게 미안해서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아주 짜릿합니다. 그 시절만 해도 좋은 사양의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돌려 조회하는 시간과 저사양의 컴퓨터로 조회하는 시간에 차이가 꽤 있었거든요. 그렇다 보니 고사양의 컴퓨터로 테스트할 때 속도가 나쁘지 않았는데 현업에서 느리다고 아우성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네요.




컨설턴트로서 제가 파는 것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소프트웨어 솔루션을 기업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기업 솔루션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어플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단지 조금 더 복잡하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바로 사용하기보다는 사전에 준비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 사전준비를 PI(Process Innovation, 프로세스 혁신)이라 하고 그 과정을 거친 후, 실제로 프로그램을 수정하고 여러 시스템을 연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을 시스템 구축이라 합니다. 저는 PI와 시스템 구축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하는 컨설턴트입니다. 개인이 카카오톡부터 인스타그램, 인터넷뱅킹, 주식투자 어플 등 개인의 취향이나 직업에 따라 수 많은 어플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기업도 산업과 기업의 수준에 따라 수 많은 기업 솔루션을 사용합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전문인 영역은 ERP(Enterprise Resources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이고, 주로 파는 솔루션은 SAP라는 전세계 기업솔루션 시장점유율 1위인 회사에서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SAP사에서 만드는 대표 제품을 업계에서는 보통 SAP라 칭합니다.


회장님의 아이폰


저한테 SAP는 어떤 솔루션이냐고 물으면 딱 2가지로 답합니다.

‘비싸고, 어렵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면 불친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솔루션을 도입해야 하느냐? 첫 만남의 회장님들께 제가 주로 듣게 되는 질문입니다. 쏘아보는 눈에는 이런 말 풍선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허튼 소리는 충분히 들었어. 내가 납득이 가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게야.’

저를 포함한 수 많은 컨설턴트들이 진땀을 흘려가며 다양한 답을 했을 겁니다. 주로 이런 유형이었겠죠. 이미 본격화된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 ERP는 필수이고 데이터의 뼈대 역할을 해야 하는 ERP는 시스템적으로 로버스트하고 데이터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SAP를 사용해야 한다. 회장님들의 반응도 유사했겠죠.

‘뭔 개소리야, 다시 알아듣게 정리해서 다시 와.’

열 손가락 넘어갈 정도로 이런 상황을 겪고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조금 도전적으로 준비해 갔습니다. 물론 상사에게는 말하지 않았죠. 말하면 말릴 것 같았거든요. 그 회장님은 70세에 가까우신데 최신 아이폰을 사용하시더군요.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싶었습니다.

“회장님, 스마트폰 뭐 쓰시나요?”

“아이폰 사용하네.”

“얼마나 자주 바꾸시나요?”

“신제품 나올 때마다 알아서 바꿔주더구만, 허허허. 한팀장, 나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는 순간 ‘한 팀장은 내년에 없겠구나.’ 하지만 제 입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죠.

“네, 그러시죠. 역시 검소하십니다. 그런데 회장님, 한팀장이 회장님 스마트폰을 5년에 한번 그것도 중국산 저가 폰으로 바꿔주면 어떨까요?”

회장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습니다. 같이 간 제 상사는 싼 미소를 흘리고 있었죠. 이대로 멈추면 저는 복귀해서 죽는 겁니다. 살기 위해 빠르게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사실 스마트폰의 새로운 기능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프리미엄 모델을 새로 사느냐? 냉정하게 생각하면 중국산 저가 폰도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기능은 다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바로 간지때문이다. 여기까지 쭉 얘기했을 때 회의실 공기가 다시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 간지?”

당황인지, 놀라움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것이 묻어 있는 회장님의 짧은 답변. 저는 빨리 덧붙였지요. 

회장님처럼 누구나 아실 만한 분이라면 스마트폰으로 간지를 낼 필요가 없지요. 회장님 자체가 간지시니까요. 하지만 저처럼 이름없는 사람이 중국산 저가폰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 스마트폰으로 저를 판단할 겁니다. 기업이 사용하는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SAP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회사의 클래스가 정해집니다. SAP는 돈이 있다고 쓸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일하는 방법이 정비되어 있어야 하고, 그에 걸맞는 직원들의 수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간지라 표현한 겁니다.”

마치 그 방의 온도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포근해지더군요. 이때다 싶었습니다. 총알을 쏟아 붓기로 했죠.

제가 IT팀장을 통해 확인해보니 지금 사용하고 계신 시스템이 2009년에 새로 구축하셨더군요.”

회장님은 옆에 있던 IT팀장에게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긍정의 눈빛이 오갔습니다.

그때 가장 유행하던 휴대폰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하는 기심이 방을 채웠습니다.




전지현 아시죠? 그 여배우가 광고했던 삼성 햅틱이라는 피처폰이었습니다. 아직도 햅틱폰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전화 통화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최신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기능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일 먼저 카카오톡이 안 될 거고, 대중교통을 자주 사용한다면 버스카드 기능을 사용 못할 겁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모바일 뱅킹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죠. 기업 솔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지금 IT팀장은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있을 겁니다. 자체 개발한 지금 시스템에 모바일, 인공지능, 블록체인, 이런 것들을 반영하려 하니 답이 안 나올 테니까요. 회장님은 가끔 우리는 왜 이런 거 도입 안 하느냐고 야단치셨죠?”

애니콜 햅틱 2009년형


그 순간 저는 봤습니다. IT팀장 입술에 옅게 번진 미소를요. 그날 회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래, 니 말이 맞다. 바로 SAP 해라.’ 였을까요? 그건 요즘 드라마에서도 벌어지지 않는 일이죠. 당연히 다시 였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졌죠. ‘맨날 보던 그 놈들 중에 하나는 아니구나!’하는 야릇한 시선을요.


다시 잠실나루역으로 돌아갈게요. 선배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설계의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보고 프로그램을 짜고,
궁극적으론 그 시스템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
그러니까 프로는 자신을 위해 설계를 하지 않아.


선배는 기술은 어떻게든 따라 하거나, 살 수 있다 했습니다. 정말 모방하기 힘든 것은 사용자 입장에서 보는 관점과 디테일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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