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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실컨설턴트 May 16. 2019

성급함은 진실과 앙숙이다

시스템 컨설턴트의 본능 (1)

고객사 화장실 벽에 해독 불가의 표식이 붙어있다.


처음에는 누군가 딴 데서 떼어다가 잘못 붙인 것인 줄 알았는데, 세 개 층의 동일 위치에 붙어있는 것으로 봐서 뭔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 달 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을 물어보고 급기야 청소 여사님께도 여쭤봤으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능이 살아난다.

1. 붙어 있는 벽의 부근에 있는 시설물에 대한 안내일 것이다.
    (주변에는 벽거울과 세면대가 있다. 그렇다면 뭔가 세면대의 사용법이 아닐까)
2. 냉/온이라는 표식이 쓰인 것으로 보아 냉수와 온수에 대한 안내로 보인다.
    (그래서 찾은 것이 수도꼭지에 숨어있는 온수, 냉수 방향표시)
수수께끼의 그림


해석 결과 : 수도꼭지를 좌우로 틀어 냉수와 온수를 이용하시오.


이거 너무 난해한 거 아닌가. 그런데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생각보다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한다. 방금도 회의 자료를 파워포인트 문서로 받았는데 해독이 안 된다. 메일의 말미에 친절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세한 건 회의시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에라이, 신발 끈...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보도 할 수 있지만,
복잡한 걸 간단히 표현하는 것은 천재의 영역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그림 그린 사람은 바보 멍청이"


1차 결론을 내렸는데, 이상하게도 개운하지가 않다. 회의를 마치고 각 층의 화장실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그림이 약간씩 다른 것이 아닌가. 7층에서 본 첫 번째 그림으로는 약간은 의심되었지만 수도꼭지와 결합이 가능했다. 그런데 다른 층의 '여', '옥', '상', '급'이 쓰여진 표식을 보니 첫 번째 가정은 틀렸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4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유레카".


각 층마다 조금씩 다른 표식


최종적으로 전문가의 확인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벽 속의 배관을 표시한 것이리라. 이 결론으로 그림을 시계 방향으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7층: 냉수와 온수가 지나가는 지점 표시
3층: 냉수와 온수가 지나가는 지점 표시 & 온수는 여자화장실로부터...
8층: 옥상에서 냉수 공급 & 온수는 여자화장실로부터...
4층: 냉수 지나는 길이 다른 벽에 세로로도 있음


아무도 모르게 씩 웃었다. 별것 아닌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법을 오늘 하나 배운 것 같은 뿌듯함.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명심해야 할 몇 가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느낀 점>

첫째,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마라. 성급함은 진실과 앙숙이다.
둘째, 내 눈과 내 기억을 맹신 하지마라. 처음에는 모든 그림이 같은 줄 알았다.
셋째, 끈질김이 컨설팅의 기본이다. 계단을 오르내린 횟수만큼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진실은,

"알고보니 내가 바보 멍청이"


(혹시 이 글이 널리 퍼지면...)

건축시공 하시는 분이 계시면 제가 해석한 것이 맞아 보이는지 댓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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