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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신 Oct 17. 2018

[앙리 플랑타쥬네]-3. 죽어가는 왕과 탄생하는 왕

기신의 역사평설-플랜타지넷 왕가 이야기


<앙리 플랑타쥬네-3. 죽어가는 왕과 탄생하는 왕>


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는 노르망디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학자왕(Henry Beauclerc).


그것이 당대인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다.
별명에 걸맞게 헨리 1세는 학문에 깊은 조예를 보인 인물이었다.

본래 그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아무것도 얻지 못할 남자였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중세 유럽사회에서 귀족 가문의 셋째 아들은 기적의 아이인 동시에 가장 골칫거리인 존재였다.
장자와 차자가 죽는다면 가문을 이을 소중한 존재가 되겠지만,
장자와 차자가 살아있다면 셋째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중세유럽 귀족 사회를 결정짓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대한 문제는 '상속'이다.


귀족은 결국 선대로부터 작위와 사람, 영지를 물려받은 존재다.


때문에 3가지를 어떻게 후대로 승계시키느냐가 귀족 가문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영지였다.


왜냐하면 귀족 작위도, 기사도, 농노도 모두 영지의 부속물인 탓이다.

중세 후기로 가면 장자는 영지 승계를, 차자는 교회의 고위 성직을, 삼자는 용병의 영역으로 나가는 것이 일반화된다. 하지만 헨리 1세 시대에는 그것이 일반적이지도 않았기에 윌리엄 1세는 무척 고심해야 했다.



정복왕 윌리엄은 죽음을 맞이하며 아들들에게 이렇게 상속을 명했다.

바이킹 조상이 프랑스 왕으로부터 받아 승계한 노르망디 공작령은 장자 로베르에게,

자신이 정복하여 앵글로색슨 왕으로부터 빼앗은 잉글랜드 왕령은 차자 윌리엄에게,

헨리에게는 5,000 파운드의 돈과 모친의 작은 영지(버킹엄, 글로스터)를 주어라.


(* 정확히는 진짜 둘째아들인 리처드는 일찍 죽어 실제로는 헨리 1세는 넷째 아들)


헨리는 아주 불만스러웠지만 때를 기다렸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때로 패배해 영지를 형인 윌리엄에게 모두 빼앗겼을 때도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 사이 더 큰 것을 욕심내던 큰형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와 둘째형 잉글랜드 왕 윌리엄은 서로 싸웠고, 승자는 잉글랜드 왕 윌리엄, 곧 윌리엄 2세가 되었다.


그 사이 아무 영지도 없었던 헨리는,
서부 노르망디를 자력으로 장악했다가 윌리엄 2세와 로베르 공작에게 빼앗겨 아주 작은 영지만을 가진 채 런던에 머무르고 있었다.


패배한 큰형 로베르 공작은 제1차 십자군이 조직되자 미련 없이 성지로 떠났고,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는 여유롭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공작령을 장악하는 데 힘썼다.


그때 사냥터에서 윌리엄 2세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헨리는 경쟁자들을 밀어붙이고, 타협하며 갖은 모략을 꾸민 끝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했고,
옛 잉글랜드 왕가의 후예이자 스코틀랜드의 공주인 마틸다와 결혼하여 정통성도 강화했다.


나아가 다시 십자군에서 돌아온 형 로베르 공작을 패배시키고 죽을 때까지 노르망디의 한 성에 가두기까지 했다.

통치기간 내내 그는 "법"을 중시했고,
잉글랜드에는 법치를, 노르망디에는 능란한 영주간의 중재를 통해 통치를 행하며 적을 물리치고 왕권을 강화했다.


웨일즈는 장악하고, 앙주를 무찔렀으며, 스코틀랜드와는 혼인 동맹으로 평화를 이루었다.

후대에 헨리 1세는 잉글랜드의 순회법정의 시조이자, 
행정과 관료체계를 처음으로 정립한 입법자로 존중받을 정도다.



이렇게 보면 헨리 1세는 인생의 승리자다.
그럼에도 헨리 1세는 죽음에 임박해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왕국과 공작령은 모두 어떻게 될 것인가?

유일한 법적 후계자는 엠프레스 마틸다 한 명 뿐이다.
하나뿐인 정식 아들은 이미 15년 전에 죽고 말았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작위란 남자가 승계하는 것이고, 앵글로-노르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죽은 이후에도 헨리 1세는 수많은 반란을 진압했고,
적수들의 눈을 빼앗아 멀게 만들며 싸워 이겼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적인 큰 형 로버트의 아들 윌리엄 클리토를 패배시켰다.


하지만 마틸다의 상황은 계속 불안했고, 헨리 1세는 강대한 적수인 앙쥬 백작가와 결혼하는 방식으로 마틸다의 입지를 강화했다.


(1129년의 형국)


문제는 엠프레스 마틸다(26세)와 앙주 백작 조프루아(15세)의 사이가 무척 나빴다는 것이다.

한때 황후였던 마틸다는 걸핏하면 조프리와 싸웠고,
노르망디로 도주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간신히 화해시켜 탄생한 것이 바로 마틸다의 아들, 앙리였다.


1133년 3월 5일.

앙리가 탄생했을 때 헨리는 기뻤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헨리와 마틸다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틸다는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강하게 의식했고,
자신이 반드시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남편 조프리도 마틸다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조프리의 경우 잉글랜드 왕위보다 우선 노르망디 공작령이 탐났다.
오랫동안 앙주 백작 가문은 노르망디의 노르만족들과 싸워왔고 괴롬힘을 당해왔다.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노르망디 공작 작위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마틸다를 지지하는 잉글랜드 귀족도, 노르망디 귀족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틸다는 여자인데다, 성격은 다혈질이라 귀족 사회에서 인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용서를 몰랐다.


때문에 마틸다는 자신의 아버지 헨리 1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고분고분해야 했겠지만,

정복왕 윌리엄의 손녀이자 고대 앵글로색슨 왕가의 피를 모계로 이어받은 다혈질의 마틸다는 오히려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요구했을 것이다.


"노르망디 공작령의 공작 직속령을 제게 주세요. 그리고 살아계신 동안 노르망디 귀족들에게 제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주세요."
"이미 7년 전에 모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느냐?"
"그걸로는 부족해요! 스테판이 왕위를 노리고 있잖아요!"


당시 오랜 헨리 1세의 숙적이었던 윌리엄 클리토가 죽은 상황에서, 
마틸다를 제외한 잉글랜드 왕위의 계승 후보자는 3명이었다.


1. 블루아 가문의 모르텡 백작 스테판.
스테판은 강대한 블루아 백작 가문 출신인데다 윌리엄 정복왕의 외손자이자 헨리 1세의 외조카였고, 무엇보다도 부유한 부르고뉴 공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있었다.

2. 샹파뉴 백작 티보
티보는 역시 블루아 백작 가문으로 정기 시장을 열 정도로 부유한 샹파뉴 백작령을 가지고 있었고, 헨리 1세의 오랜 지지자였다.

3.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


로버트는 헨리 1세의 서자로 잉글랜드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자라는 약점이 커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로버트는 마틸다의 후원자로 나서는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스테판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강력하며 많은 잉글랜드 내 지지자를 가지고 있는 적수였다.


마틸다는 스테판을 꺾기 위해 우선 노르망디부터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노르망디를 장악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는 아버지 헨리 1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왕은 죽을 때까지 왕인 법이다.


헨리 1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용서한 적이 없었고,
마틸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거절한다."


하지만 마틸다의 성격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1135년, 노르망디 남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기욤 백작이 이끌던 이 반란군의 배후에는 마틸다와 앙주 백작 조프리의 후원이 있었다.


왕위에 오른 이후로 반란을 내버려둔 적이 없는 헨리 1세는 노구를 이끌고 노르망디로 진격했다.
하지만 11월, 늙은 헨리 1세는 쓰러졌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칠성장어를 과식한 탓.

사경에 시달리면서도 헨리 1세는 왕위 후계를 걱정했다.


성격 나쁜 마틸다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까?
외손자인 앙리는 과연 무사할 것인가?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작령은 어떻게 될까?


헨리 1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적자가 3명이나 있었는데도 
계승을 두고 오랜 내전이 벌어진 바 있다.


지금 헨리 1세가 남기고 가는 것은 많은 서자들과 단 하나의 적녀.
그리고 유력한 조카들이다.


하지만 헨리 1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래 결정,
마틸다를 유일한 계승자로 세운다는 방침을 바꾸지는 않았다.


마침내 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20여일이 지난 12월 22일.
앙주에 머무르던 마틸다보다 빠르게 선수를 친 블루아의 스테판이 잉글랜드로 진입했고,

잉글랜드 왕 스티븐 1세로 즉위했다.


마틸다는 참거나 인정하지 않고,
즉시 전쟁을 일으켰다.


18년에 걸친 계승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앙주에서 자라던 앙리 플랑타쥬네의 나이는 고작 2세였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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