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서기 21세기 사회에서 성공이란 흔히 명성, 부, 자아실현으로 정의된다. 이는 현대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성공이란 그 사회가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기 12세기, 중세 유럽 사회에서 성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중세 유럽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2가지다.
기독교회, 그리고 봉건제도.
바꿔 말하면 중세의 인생에서 성공한 자는 2가지를 획득한 자다. 현생의 영광과 천국의 입장권을 보장받은 자. 한 마디로 봉건제도의 최고위자인 '왕'이 되는 동시에 교회로부터 인증된 교황청의 '면죄부'를 얻은 자가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인 셈이다.
앙쥬 가문의 영주, 풀크 5세는 바로 그런 남자였다.
풀크 5세는 프랑스의 앙주 지방을 지배하던 백작으로, 바로 윗동네인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고 있던 헨리 1세의 가장 큰 숙적이자, 헨리 1세의 자리를 노리던 윌리엄 클리토(헨리 1세의 조카)의 막강한 후원자였다.
풀크 5세는 오랫동안 프랑스 왕 루이 6세와 함께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노르만 해적의 후손인 헨리 1세를 괴롭혀 왔다. 하지만 1120년, 화이트쉽이 침몰한 바로 그 해에 풀크는 결국 노련한 헨리 1세에게 패배하고, 화의를 맺은 후 자신의 딸, "앙쥬의 마틸다"를 헨리 1세의 아들 윌리엄 아델린과 결혼시켰다.
바로 1120년 11월, 화이트쉽에서 침몰해버린 그 아들이다.
헨리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풀크 5세는 그때까지 전혀 성공한 남자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영지를 잘 다스리지도 못했고, 숙적에게 패배하여 딸을 내주어야 했으며, 단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앙주 백작령을 지키기에 급급한 신세에 불과했다.
숙적의 아들이 도버에서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풀크 5세는, 현생에서 얻지 못한 영광 대신 전쟁에서 쌓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갖기로 결심했다.
바로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서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는 대규모 십자군은 아니었지만, 풀크 5세 정도의 대영주가 활약할만한 전장은 십자군이 지배하던 당시의 팔레스타인 어디에서나 있었다. 또한 대규모 십자군이 아니라도 성지 예루살렘에 가서 전투와 성지 순례를 치르는 자에게는 로마 교황청이 약속하는 천국행 티켓, 면죄부가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풀크 5세는 오욕의 패전만을 남긴 프랑스 앙주백작령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가 만약 11월까지만 기다렸다면 윌리엄 아델린의 죽음과 함께 엄청난 기회를 얻었겠지만, 역량도, 인내심도, 운도 부족한 이 남자는 그 전에 성지로 떠나버린 것이다.
7세밖에 안 된 아들 조프루아를 남겨둔 채.
하지만 예루살렘에 도착한 풀크 5세에게는 전혀 색다른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예루살렘 왕국은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왕국이다. 당시 왕국의 왕가는 프랑스의 볼로뉴 백작가이자 신성로마제국의 로렌 공작가문이었던 로렌 가문에서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으로 십자군 전쟁을 온 로렌 가문의 왕,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힘은 약해져가고, 주위를 둘러싼 이슬람 군대는 나날이 강해져가던 시점에 보두앵 2세에게는 자신의 딸, 멜리장드와 결혼해 왕권을 지켜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 후계자는 예루살렘 왕국에 가장 부족한 자원을 공급해줄 자여야 했다. 바로 서유럽 출신의 기사. 그리고 당대 유럽에서 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실력자는 봉건 사회의 위계 정점에 있는 대영주들밖에 없었다.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별로 유능한 통치자는 아니었지만, 용감하고 뛰어난 무용을 갖춘 기사였고, 무엇보다 앙주 출신의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7년 동안 예루살렘 일대를 누비며 풀크 5세는 간만에 마음껏 승전을 즐겼고, 그를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는 눈여겨보고 있었다.
마침내 전쟁을 마치고 면죄부 요건을 완전히 획득한 풀크 5세는 프랑스로 귀국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보두앵 2세가 제안한 것이다.
"나의 딸과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 되는 게 어떻겠는가?"
풀크 5세는 뜻밖의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왕.
아무리 대영주라도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아무나 왕을 참칭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왕이란 '신에게 점지받은 자'로서, 정당한 계승권이 있는 자만이 주장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교황청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면 왕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도 비슷비슷한 대영주들 사이에서 왕위를 참칭했다가는 공동의 적이 되어 멸망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풀크 5세에게 왕위가, 그것도 성지 예루살렘의 왕위가 다가온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 왕위는 위험한 자리였다. 외부는 이슬람 국가와 대영주들에게, 내부는 종교기사단과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갈라져 권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능한 통치자가 아닌데다, 전략적 안목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 남자는 당연히 이런 현실보다 눈앞에 다가온 왕위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풀크 5세는 어쨌든 앙주 백작이었고, 앙주 백작령의 문제를 우선 해결하고 와야 했다.
때문에 풀크 5세는 1127년 왕위로 들뜬 마음을 안고 프랑스에 귀국하게 된다. 그 시점에 바로 헨리 2세가 승부수를 건 것이다.
"나의 딸, 황후 마틸다와 당신의 아들 조프루아가 결혼하여 동맹을 굳건히 하는 게 어떻겠소?"
풀크 5세는 귀국하자마자 돌아온 행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앞서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엠프레스 마틸다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로,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작령의 제1순위 추정 계승자였다.
제프리의 나이가 고작 1127년 당시 14세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오히려 풀크 5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려도 앙주 백작령을 막강한 사돈인 헨리 1세가 지켜준다는 보증이 생긴 셈인데다, 잘하면 잉글랜드 왕위까지 자신의 아들 혹은 손자가 획득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었다.
결국 1128년 6월 11일, 풀크는 자신의 앙주 백작령을 급히 계승시킨 신임 앙주 백작 조프루아(15세)와, 전직 황후 마틸다(26세)의 결혼식을 주재한 후,
1129년 6월 2일 다시 예루살렘 왕국으로 떠나버린다.
이후 멜리장드 공주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이 된 풀크 5세는, 십자군 귀족들과 싸우고, 왕비인 멜리장드와도 싸우며, 새로운 아들들인 보두앵와 아모리를 낳으며, 전투에는 능하지만 왕국에 대한 실권은 없는 허울 좋은 왕으로 지내며 살았다.
하지만 이것은 십자군의 역사로 흘러갈 뿐, 우리의 이야기인 플랑타쥬네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본래 앙주 백작 가문으로 불리우던 이 가문이 "플랑타쥬네(금작화, Planta Genista)"로 불리우게 된 계기도 바로 이 결혼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전직 황후 마틸다와 예루살렘 왕의 아들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사이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앙리 플랑타쥬네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