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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신 Oct 17. 2018

[앙리 플랑타쥬네]-1. 엠프레스 마틸다

기신의 역사평설-플랜타지넷 왕가 이야기


[앙리 플랑타쥬네] 1. 엠프레스 마틸다(Empress Matilda)


오늘날 인간의 혈연은 크게 두 가지로 추적할 수 있다.


하나는 모계로 이어지는 미토콘드리아, 다른 하나는 부계로 이어지는 Y염색체다. 
그렇다면 헨리 2세의 미토콘드리아 혈연, 곧 모친은 어디에서 왔는가?  


앞서 본 화이트쉽 침몰 사건(1120년) 직후, 헨리 1세의 적법 승계자는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마틸다(Matilda). 
당시 그녀는 18세 나이의 신성로마제국의 황후로 현재의 독일과 이탈리아를 오가는 중이었다.


마틸다의 남편은 하인리히 5세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유럽에서도 별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계사에는 보름스 협약에 대해 서술할 때 짤막하게 한 줄 나오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남자의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황제, 하인리히 4세.
그리고 황제를 무릎꿇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다만, 그림 속 집 안에 있는 사람은 교황이 아니라 하인리히 4세의 필생의 숙적, 토스카나 여백작인 또 다른 마틸다 이다.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의 목적과 벗어나므로 생략하지만, 꽤 스펙터클한 삶을 산 여자다.)


하인리히 5세는 바로 그 하인리히 4세의 차남이다. 
차남인 그가 황제의 위를 승계한 데는 몇 가지 비화가 있다. 
본래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는 후일담이 있다.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다져 결국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에서 몰아냈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왕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사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하인리히 4세의 장남은 교황의 꼬드김을 받고 하인리히 4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하고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인리히 4세는 차남에게 차기 황제를 뜻하는 "도이칠란트 왕"의 자리를 물려주지만, 하인리히 5세도 교황의 부추김을 받고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실의 속에서 사망하고,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었다.


부친을 사실상 살해한 저주였을까?
당대 유럽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하인리히 5세는 평생 자녀를 얻지 못했다.


이게 왜 저주라는 소리까지 들었느냐 하면, 하인리히 5세의 황후 마틸다는 이후 증명되듯이 불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인리히 5세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마틸다는 7세에 하인리히와 결혼한 이래, 23세가 되도록 자녀를 낳지 못했고,
하인리히 5세는 1125년 39세로 사망한다.
실패와 패배와 후퇴로 가득했던 후회 많은 생이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황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게 되지만, 이 대목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황후 마틸다가 두 남자의 죽음을 통해, 독자적이고 중요한 위치로 올라섰다는 점이다.


동생 윌리엄의 사망으로 마틸다는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북동 프랑스)의 유일한 적법 상속자가 되었다.
남편 하인리히의 사망으로 마틸다는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유럽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여자가 되었다.


1125년, 헨리 1세는 마틸다를 자신의 추정 상속인(heir presumptive)으로 공표했다.
추정 상속인이란, 왕위 계승에 있어서 제1순위 상속자이지만, 장래에 상위 계승권을 가지는 인물이 태어나는 순간 2순위로 밀려나는 자를 말한다.


"나에게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마틸다가 나의 유일한 상속자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작령의 모든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중세 유럽은 남성 중심 사회다.
또한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작령을 지배하던 귀족들은 역사책에서 노르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 노르만이라는 사람들은 본래 혈통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출발한 바이킹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힘을 숭상하고, 동시에 교활하며, 아주 결단력이 뛰어난 특성을 보여준다.
노르만 귀족들의 눈으로 볼 때, 여성 왕위 계승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마틸다는 노르만 귀족들이 경멸하고 증오하는 앵글로-색슨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약점도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마틸다의 어머니-그러니까 마틸다의 죽은 윌리엄의 어머니이자, 헨리 1세의 첫 번째 왕비는 "에디트"라는 이름인데, 스코틀랜드의 공주였다. 그런데 이 "에디트" 왕비의 어머니는 바로 헨리 1세의 아버지인 저 유명한 "정복왕 윌리엄"에게 패배하여 쫓겨난 앵글로-색슨계열 잉글랜드 왕가의 혈족이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마틸다는 노르만 왕가의 후예이자, 앵글로 색슨 왕가의 후예이기도 했다.


게다가 헨리 1세에게는 적도 많았다.


1. 먼저 헨리 1세의 큰 형이자 전직 노르망디 공작인 로버트가 아직 살아있는 채로 헨리 1세에 의해 구금되어 있었다. 헨리 1세는 바로 로버트에게서 노르망디 공작령을 빼앗은 바 있다.

2. 로버트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 통칭 클리토가 프랑스 왕, 앙주 백작 등 프랑스의 실력자들을 뒤에 업은 채로 헨리 1세에게 노르망디 공작령과 잉글랜드 왕관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3. 무엇보다도 가장 강력한 적이자 거침없는 성격의 대귀족, 앙주 백작 풀크가 노르망디 공작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틸다가 여자의 몸으로 혼자 세력을 키우기도 어려웠다.
중세 유럽에서 왕족이나 귀족이 세력을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세란 봉건주의 사회다.
봉건주의 사회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사회는 법이나 이념, 체제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종관계라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1차적인 사회 원리로 작용한다.


이런 사회에서 세력을 키운다는 것은,
충성을 맹세한 기사의 숫자를 늘리고, 주종관계를 맺은 귀족들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네트워크를 단단히 다지는 것을 의미한다.
마틸다는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중세가 남성 중심의 사회라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1127년, 헨리의 적이자 조카인 "윌리엄 클리토"가 프랑스 왕에 의해 플랑드로 백작에 일시적으로 임명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플랑드르는 지금의 벨기에 지방에 해당한다.
클리토는 플랑드로 백작으로서 더욱 강력하게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플랑드르는 노르망디의 바로 동쪽이며 잉글랜드에도 아주 가깝다.


헨리는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클리토와 싸워야 할까?
귀족들을 숙청해야 할까?
아니면 아들을 새로 낳아야 할까?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했다.
그때, 헨리는 그의 인생 속에서 늘 빛을 발했던 장기를 꺼내들었다.
치밀하고, 주도면밀하며, 교활하지만, 동시에 목적을 위해서는 남들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방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헨리는 자신의 가장 강대한 적,
앙주 백작 가문에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이미 죽은 아들 윌리엄과 앙주 백작의 딸을 결혼시켜 한 차례 혼인 동맹을 맺었다가 틀어진 전례가 있기에 더욱 어려운 혼인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밀어붙였고, 마침내 성공했다.




1128년 6월,
전직 황후 마틸다(26세)는,
앙주 백작의 계승자이자, 막 앙주 백작위를 승계한 소년, 
제프리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제프리의 나이는 14세.
조혼이 성행한 중세에도 아주 이례적인,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었다.


여기에는 당연히 사연이 있었으니..
후세에 "악마의 후예들"이라고 까지 불리운 앙주 백작 가, 
혹은 플랑타쥬네(플랜타저넷) 가문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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