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나의 로스쿨 생존기14

연재웹소설-2. 네가 오는 길 (8)

by 기신

<나의 로스쿨 생존기>


기신


2. 네가 오는 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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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쁘군.

하지만 고함남도 면박녀와 안면은 있었던 모양이다.

막무가내로 고함치는 대신 낯을 있는 대로 찡그리다 대꾸하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하다.


“내가 왜 네 선배냐?”

“다 같이 고시판 들어온 처지인데, 선배지 그럼 아니야? 먼저 고시친 고시 선배잖아?”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다! 내가 너랑 학교를 같이 나왔냐, 고향이 같냐? 고시생이라고 다 같은 고시생인 줄 알아!”


고함남의 호통은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이다.

그때 면박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마치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다.


“그럼 여기서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호통치고 있는 건데요? ‘선배’도 아니면서.”


함부로 화를 내는 사람을 세상은 무례한 자라고 말한다.

합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거나 이유가 있다면 세상은 분노와 고함을 어느 정도 용인한다.

선배라는 위치는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고함남은 면박녀와 내 친구 민규를 비롯해 누구와도 합리적인 권력관계에 있지 않다.

따라서 고함남의 호통은 명백히 무례한 짓이다.


몇 마디 말 만으로 지금까지 카페를 소란스럽게 만들던 고함남은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민규의 멱살을 풀고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어쨌든 계속 멱살을 잡힌 채 서 있는 꼴은 썩 보기 좋지는 않았거든.

그러나 고함남도 10년 동안 고시생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너희들이 내 고통을 아냐!”


물론 내게 고함남의 고통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있던 고시생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만스레 쳐다보던 다른 사람들도 뭔가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은 걸 보면 말이다.


“살아오면서 꿈이 단 하나 밖에 없었어! 합격해서, 법조인이, 검사가 되는 거야! 그런데 이 빌어먹을 나라가 날 붙여주질 않아! 분명히 자격도 있고 시험도 합격했는데! 단 한 번만 도와주면 통과할 것 같은데 통과시켜주질 않는다고!”


왜 면접에서 고함남이 떨어졌을까?

사실 알 것 같다. 이 남자는 성격에 문제가 있다.

굳이 시험에 불합격해서 나빠졌다기보다 대인관계를 잘 맺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면접에서 과도하게 긴장해 그 결함이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고함남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수 있다.

어쨌든 2차 시험을 통과하면 사법시험을 합격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고 보통은 그게 맞거든.


“3차에서, 면접에서, 누구나 다 통과하는 형식적 시험에서 떨어진 내 고통을 아냐고!”


물론 나는 그 고통을 모른다.


꼭 사법시험을 쳐야 할까?

법조인이 되어야만 할까?

인생에 길이 하나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길이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길을 찾으면 되잖아, 선배.”


그래, 다른 길을 찾아야지. 응?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똑같은 생각을 면박녀가 말하고 있었다.


고함남은 다시 고함을 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시험이 없어지는데! 빌어먹을 로스쿨 때문에 시험이 없어지는데!”

“길이 왜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사시만 계속 쳐야 돼? 법대생이라면 법행도 치고 행시 법정직도 칠 수 있어. 변호사도 6급, 7급 공무원으로 공채되는 거 몰라?”


“너,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변호사가 더 이상 경정도 아니고 경감으로 뽑히는 시대라구! 검사가 아니라 경찰도 상관없잖아? 경간 시험은 생각도 안 해봤어?”


마치 압도된 것처럼 카페가 조용해졌다.

그 카페에는 굳이 고함남이나 민규가 아니라도 고시생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사법시험 고시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면박녀는 본인이 고시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이 있다고 말했다.


결코 쉬운 생각이 아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사람은 보통 다른 길이 있다는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때야.

내 눈에, 네가 들어온 게.

혹은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온 게.


고함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얼굴이 새빨개진 채 면박녀를 보다가 나가 버렸다. 카페 안에 있던 고시생들은 서로 수군댈 뿐 면박녀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다.

면박녀도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마도 스터디 카페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을 한 번 우연히 만날 수는 있다.

두 번의 만남도 가끔은 가능하지.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한 세 번째는 의도해야 가능하다.


나는 바로 일어나 뛰쳐나갔다.



작가의 말 : 사실은 서울은 너무 좁은 땅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어서 열 번의 우연한 만남도 가능합니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왕왕 일어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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