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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신 Mar 17. 2020

[웹소설] 세계파멸자 (6)

[웹소설-단편] 불테치노 사가 시리즈

<불테치노> - 세계파멸자 편 (6)


기신  


세계파멸자6



사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티카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게 문제냐?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티카가 이를 갈았다. 득득 갈리는 잇소리. 

티카의 손이 사핀의 두 팔을 잡았다. 

가죽으로 된 옷 위로 푸른 피가 진득하게 묻어갔다.


죽어가는 아누의 피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아누의 원념이 서리기 때문에.


“반드시 복수해줘.”


티카의 파란 눈이 사핀의 눈을 저밀 듯이 노려보았다. 

사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티카는 그대로 쓰러졌다. 


사핀은 멍한 기분으로 티카를 내려다 보았다.

마라가 티카를 살폈다.


“숨이 끊어졌군.”


그제야 오르혼 야영지의 광경이 사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오는 불타오르고 강은 푸른 피로 처참하게 물들었다.

주위는 온통 아누들의 시체들 뿐,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라가 국자 하나를 주웠다. 

국자를 젓고 있었을 여자는 심장이 꿰뚫려 즉사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저 아누의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히 어제만 해도 그녀에게 스프를 얻어먹었다. 

그 스프는 미각에 둔감한 사핀의 입맛마저 사로잡을 정도로 따뜻했었다.


마라의 손 안에서 국자가 부러졌다.


“쿠 슈문…….”


마라의 얼굴이 청록색으로 달아올랐다. 

사핀 역시 화가 난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참을 수 없을 정도다.


어차피 이 아누들, 이 계절이 지나면 보지도 않을 거였다. 

하지만 이 계절 동안 이 아누들은 사핀과 같은 부족, 같은 집단 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자유란 책임을 지는 것. 

사핀은 이 아누들과 생사를 같이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 아누들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했고 사핀은 그 상황을 막지도, 같이 죽지도 못했다.


그 순간 사핀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자욱한 연기와 화염 사이에서 한 아누가 나타났다. 


진홍의 머리칼, 

짙은 진홍빛 눈, 

얼굴 전체를 종횡하는 X자의 길다란 흉터, 

그리고 무엇보다 아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진홍빛 육신.


사핀은 저 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저 진홍빛의 육신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들어왔다. 

진홍빛 머리칼의 아누가 오만한 얼굴로 웃었다.


“오랜만이군, 엘 마라!”


사핀의 이가 절로 악물렸다.

아누의 삶은 싸움의 연속이다. 

다른 존재들과는 물론 아누끼리도 싸운다. 

아누는 비원을 위해 싸우고 자신의 정의를 위해 싸우며 남이 싫어서 싸운다.


그러나 모든 아누를 상대로 분쟁을 벌인 자는 기나긴 아누의 역사 중에서도 단 하나 밖에 없다.


“쿠 슈문!”


마라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포식자 쿠 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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