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계절

by 루미나

가을을 맞아 옷을 몇 벌 들였다.
옷장에 정리를 하고 보니
조용히 줄지어 선 브라운들이 보였다.
새로 산 옷들이 전부 브라운이다.
계절이 가을이라 브라운 옷은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브라운은
늘 ‘먼저 피하던 색’이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고,
피곤해 보이는 색이라고 생각했고,
나와는 거리가 먼 색이라고 여겼다.

평생 붙들고 살았던 색은 따로 있었다.
검정.
흰색.
그리고 핑크.

그 색들이 나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믿었다. 언제나 익숙하고, 안전하고, 실패하지 않는 색들.

그런 나의 옷장에 브라운이 들어왔다.
그 순간부터
무언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부터 색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이상한 장면을 반복해서 목격한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순간들.

비닐봉지 로고 속 초록,
싱크대 위 무청의 초록.
집안 한쪽에서 묵묵히 자라고 있는
식물의 잎들.
컵라면 포장의 노란 바탕.
멀티탭 경고문구의 작은 노란 글씨.

그 모든 초록과 노랑이
내 시야 한가운데로
툭, 하고 떨어진다.

전체 풍경을 보면
그 색만 유독 살아 있고
나머지는 뒷배경처럼 물러나 보인다.

마치
초록과 노랑이
“여기야.”
작게 불러 세우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순간
가볍게 멈춰 서곤 한다.
‘왜 지금, 이 색들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질문 자체가
요즘의 나를 설명하는 듯했다.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같은 색을 붙들고 살았다면 그건 곧 나 자신을 붙들고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브라운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초록이 생기를 품어 보이고
노랑이 갑자기
빛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내 마음의 결이
아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도
지친 마음이 기대고 싶은 색,
조금은 용기를 내고 싶은 마음이
찾아가는 색,
혹은
새로운 계절을 맞고 싶은 영혼이
먼저 손 내민 색들 인지도 모른다.

변화는 늘
소리 없이 온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다 어느 날
도드라진 색 하나로
자신을 드러낸다.

사람은 때때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감정을
색으로 드러낸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선택하는 순간이 있다.

브라운의 안정,
초록의 숨결,
노랑의 빛.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바라보는 색들은 아마도 내가 가장 필요한 감정들일 것이다.

색은 사실 색이 아니다.
그건
지금의 나를 비추고 있는
아주 작은 마음의 조각이다.

그래서 오늘, 이 변화를 조용히 붙잡아 둔다.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다.
왜 나는 갑자기 이런 색들에
끌리고 있는지.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하게 따뜻하고 괜히 반갑다.

그래서 오늘,
이 감정을
이 계절을
이상해지고 요상해진 나의 시선을

이렇게 조용히
한 편의 기록으로 남겨둔다.

언젠가 다시 읽었을 때
“아, 그때 내가 이렇게 변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웃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