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이름을 부르는 순간 보이기 시작했다

by 루미나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연습이 있어.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알아차림이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잠깐 멈춰서 보는 거.


그중에서도 제일 어렵고,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이더라.


예전의 나는 감정을 늘 두 칸으로만 나눴어.


괜찮다 / 안 괜찮다
좋다 / 싫다


딱 거기까지.

근데 막상 들여다보니까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더라.

웃고 있어도 속에서는

기대랑 불안이 같이 있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서운함이 옆에 앉아 있고.

한 가지 감정만 있는 날은

오히려 드물었어.

어쩌면 감정이 복잡한 게 아니라

내가 그걸 부를 말을 몰랐던 것 같아.

나도 감정이 애매해질 때면

짜증이나 화가 먼저 튀어나왔거든.

근데 가만히 보면 대부분은

뭔지 몰라서 생긴 불안이었어.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어른들은 불안을 잘 말하지 않았어.

대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냈지.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배웠던 것 같아.

아, 불안하면 이렇게 표현하는 거구나 하고.


조금 웃긴데,

조금 씁쓸한 이야기야.


근데 더 신기한 게 있어.

이렇게 애매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판단이 멈추더라.


“왜 내가 이러지?”


이 말은 이해하려는 말 같지만

사실은 밀어내는 말이더라.

대신 이렇게 말해봤어.

아, 이건 불안이네.

아, 이건 화가 아니라 서운함이네.

그 순간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상태가 돼.

그때부터 비난 대신 이해가 시작되더라.

기쁨도 마찬가지야.

기쁨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기쁨은 아니더라.


신난 건지,

안도한 건지,

만족한 건지,

고마운 건지.


“나 지금 기쁜가?”보다

“이 기쁨은 어디에 가까울까?”


이렇게 물어보는 게 훨씬 정확했어.

슬픔이랑 상처도 그래.

비슷해 보여도 결은 달라.

슬픔은 무언가를 잃었을 때 오고,

상처는 관계에서 와.

눈물이 난다고 다 슬픈 건 아니더라.

누군가의 말이나 태도 때문에 아프다면

그건 슬픔이 아니라

상처일 수도 있어.

이걸 구분하지 못하면 괜히

내가 더 약해진 사람 같아지더라.

분노는 거의 항상 맨 위에 있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감정이야.

근데 그 아래에는


무시당함,

억울함,

좌절,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겹겹이 숨어 있더라.

그래서 화가 날 때 나는 이렇게 물어봤어.


내가 뭘 지키고 싶어서 지금 화가 난 거지?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분노가 조금 내려앉더라.

불안도 마찬가지야.

불안은 나를 괴롭히려고 오는 게 아니라

지키려고 먼저 오는 감정이더라.

그래서 없애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커졌어.

대신


“지금 내가 뭘 걱정하고 있지?”


이 질문을 던져봤어.

그게

불안과 싸우는 게 아니라

불안을 듣는 쪽에 가까웠어.

그리고 가끔은

아무 감정도 안 느껴질 때가 있어.

짜증만 남아 있을 때.

그건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이 써버렸다는 신호더라.

못 버틴 게 아니라

그동안 버텨온 거야.


그래서 지쳐버림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쉬라는 말에 더 가까웠어.

기대도 그랬어.

기대는 희망이랑 집착 사이 어딘가에 있더라.

이건 사람을 따뜻하게도 만들고

날카롭게도 만들고.

그래서 기대가 느껴질 땐

이 질문이 필요했어.

이 기대는 나를 살리고 있나,

아니면

누군가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나.

이렇게 감정을 조금씩 정확하게 부르기 시작하니까

삶이 덜 아프더라.


덜 오해하고,

덜 폭발하고,

덜 참게 돼.


말이 많아진 게 아니라

혼자서도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제일 자주 하는 연습 하나만 남겨둘게.

하루에 한 번, 잠깐 멈춰서

이 문장을 완성해 보는 거야.


“지금 내 감정은 ○○이고, 강도는 10점 만점에 ○점.”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아도 돼.

바꾸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