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 않고, 터뜨리지도 않기

by 루미나

예전엔 감정을 표현한다는 게
다 쏟아내는 거라고 생각했어.
참다가 한 번에 터뜨리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였지.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어.
계속 서운한 게 쌓여 있었는데
괜찮은 척하고 넘기다가 결국 사소한 말 한마디에 폭발해 버린 날.

“왜 맨날 나만 이해해야 돼?”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입에서 나온 건 날 선 말이었어.
상대는 당황했고, 대화는 거기서 끝났지.
근데 이상하게 속은 하나도 시원하지 않더라.

나중에 알았어.
그건 표현이 아니라 방출이더라.
표현은 감정을 그대로 던지는 게 아니라 번역하는 거였어.
내가 느낀 걸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한 번 바꿔주는 작업.

“너 때문에”로 시작하면 대화는 거의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고 더 이상 대화가 안 됐어.

대신 이렇게 말해보는 거야.

“그때 내가 좀 서운했어.”
“나는 그 상황에서 이런 기분이 들었어.”

이 말은
상대를 몰아세우지 않고
나를 설명하는 말이더라.
그리고 지금 당장 말 못 할 때도 있어.
감정이 너무 뜨거울 때, 예전의 나는 그걸 참거나 그 자리에서 터뜨렸어.

지금은 조금 다르게 해.

“지금은 정리가 안 돼서 조금 있다가 말하고 싶어.”

이 말 하나가 관계를 망치지 않으면서 내 감정도 지켜주더라.
이건 회피가 아니야.
도망도 아니고. 감정을 다룰 줄 안다는 뜻이었어.

맨날 한쪽으로만 가던 나한테, 가운데 길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게 표현이었어.

참는 것도 아니고,
터뜨리는 것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표현이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