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5호실(시작)

1. 나무 시계

by 안개인듯

이사는 일사천리였다. 그동안 여덟 군데 정도 이사 다녔지만 언제나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짐이라곤 크고 작은 50여 개의 캔버스와 이젤 몇 개, 그리고 3인용 소파와 4개의 다리만 달린 직사각형 상판의 나무 테이블, 이동식 의자 여남은 개였다. 물론 자잘한 물건들이 있긴 했지만 모두 다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아 온 관계로 그 또한 한 개였다.


“서향인가 봐. 지도로 봤을 땐 남서향이었는데 지금 빛이 서향이지?”

가 손 그늘을 만들어 햇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괜찮은데 여름이 어떨지 모르겠네. 올여름은 더 덥다는데.”

먼저 살던 이가 떼어간 에어컨을 못내 아쉬워하며 젠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나 젠의 한숨은 하품 같았다.


“여름은 여름이고 일단 그 아줌마네 집에서 나가라고 할 때 괜찮은 곳이 생긴 게 다행이죠. 난 여기 좋아요.”

율이 전기난로를 켜서 손을 녹였다. 2월이었고 아직 추웠다.


“일단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자리를 정리하자.”

싱의 말에 난로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국일이 벌떡 일어나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여긴 화장실이 안에 있어서 너무 좋아. 우리가 그동안 화장실 난민이었잖아.”

국일이 재빠르게 커피를 만들어 한 잔씩 들려주자 모두들 각자의 의자에 앉아 마셨다. 커피 향기가 먼지 뽀얀 2월의 공간을 떠돌아다녔다.



이곳은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작업실이다.

프로 작가의 1인 작업실이 아니라 너 댓 명 혹은 대여섯 명이 모이는 공동 작업실이다.

오늘 이사를 한 이들은 아마추어이고 앞으로도 계속 아마추어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모였다.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한때는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림에 미쳐있기도 했었는데 그것은 초기의 몇 년이었다.

내가 알기에 이들의 모임은 30년이 넘었는데 그 정도면 장인이나 고수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팸플릿에 그럴듯한 프로필을 적어 넣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예외가 있긴 했는데 밍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술을 전공한 1인이었고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학파라는 얘길 들었다. 물론 유학파라고 해서 대단히 달라 보이는 건 없었으나 하여간 그런 밍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림을 그려본 일이라곤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밍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은 가욋일이었다. 궁금한 건 본업이 아닌 그런 가욋일을 버리지도 않고 계속 끌고 온 그들의 머릿속이었다.


“가만있어 봐. 시계를 어디다 달지?”

수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나를 들고 이리저리 다녔다.


“저기 나무 가벽에 달면 되겠네. 못이 잘 들어갈 것 같아. 글쎄, 이 시계 정도는 견디지 않을까? 좀 무거우려나?”

국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벽면을 올려다보았다.


“시계, 참 오래 쓴다. 우리의 마스코트가 망가지면 안 되지.”

수가 기특하단 말투로 중얼거렸다.


“뭘, 가끔 이상할 때도 있어. 건전지가 멀쩡한 데 안 가기도 하더라고.”

젠이 수상한 눈길로 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수가 의자 위로 올라가 못질을 하곤 키 큰 국일이 와서 나를 못에 걸었다.



맞다. 나는 이들과 30여 년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나무로 만들어진 시계다. 이곳엔 나 말고도 다른 식구가 있는데 하나는 소파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 테이블이다. 물론 그 둘은 나보다 훨씬 연배가 아래다. 이 모임이 시작된 지 10년도 더 지나 자그마한 월세 룸을 갖게 되었을 때 기증받은 것이다. 소파는 불그레한 가죽제품인데 본래 5인용이었으나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통에 양 날개는 없어지고 3인용 몸통만 남았다. 사람이 앉는다기보다는 주로 가방이나 옷, 혹은 화장지 같은 물건을 쌓아두었는데 때때로 화장지를 베고 낮잠을 자는 젠이 있어서 그나마 소파 같았다. 그리고 원목으로 만들어진 네 개의 긴 다리를 가진 테이블은 열려있는 수납장으로 쓰였다. 수납장으로 쓰기에는 아깝기 그지없는 외모였으나 이사 다니는 곳마다 공간만 덩그러니 있는 창고형이라 컵과 커피, 생수와 필기구, 온갖 것 등을 그 위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볼 땐 작업실에서 제일 처량한 팔자였다. 그래도 복잡한 그곳이 싱의 손길로 정돈되곤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싱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정리해서 ‘정리의 마이더스’로 불렸다.


그들은 나를 높이 걸고 맞은편에 거울을 마주 보이게 붙인 후에 각자의 짐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날이 추웠지만 먼지 때문에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았더니 주인 할머니가 부동산과 함께 거침없이 쑥 들어왔다. 할머니는 이목구비가 압축된 듯 주름져 귀여운 퍼그 같았다.


“자기들, 수도세 만원 내야 하는데 왜 자꾸 5천 원이래.”

할머니 입에서 나온 ‘자기들’이란 말에 싱이 ‘어머머’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싱 외에는 아무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할머니가 못마땅한 소리로 툴툴거리자 율이 끼어들었다.


“할머니, 저는 세탁기, 정수기, 화장실, 샤워 다 해도 만원 나와요. 그런데 여긴 화장실이나 쓰고 손이나 씻지 누가 물을 써요. 물도 사다 먹는다고요. 화장실도 일주일 내내 쓰는 것도 아니고. 전에 있던 곳에서는 우리 수도세 받지도 않았어요. 얼마 안 된다고.”

그러자 할머니의 미간이 찌그러져서 고약한 퍼그 같았다.


“그래요. 사장님. 저희가 물은 거의 안 쓰거든요. 만일 이전보다 수도세가 많이 나온다면 그땐 저희가 더 내죠. 사장님.”

역시 젠이었다. 할머니가 사장님이 되는 순간 할머니의 주름이 다소 펴졌다.


“예쁘게 해 놨네.”

할머니 사장님은 어느새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수도세 얘기는 까마득하게 잊고 만족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웃었다.


“그런데 저게 뭐야? 에이, 시계가 무슨 나무토막이야. 안 어울려, 이쁜 걸로 바꿔.”

순간 맞은편의 거울이 나에게 빛을 반사했다. 나의 불안해 보이는 입지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하하, 아녜요. 할머니, 아니 사장님. 저 시계는 우리 식구예요. 아마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알고 있을 걸요? 이무기가 되었는지 몰라요. 하도 묵어서.”

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직 쓸 만 해. 처음보다 못생겨지긴 했지만.”

싱이 먼지떨이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바탕 수도세 얘기가 끝나자 다시 작업실은 정리 모드로 들어갔다.


“그런데 밍은 영 안 올 모양이지?”


“그렇지, 참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렇게 다섯으로 확정되나 봐.”


“만일 밍이나 참이 같이 온다고 했으면 여긴 옹색하지. 더 큰 데를 알아봐야 됐겠지. 그런데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수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뭐 참이나 밍뿐이니? 시작은 20명도 넘었었지. 그런데 결국 다섯만 남은 거야. 우리가 지독하게 이상한 사람들이잖아.”


“그걸 전문용어로 골수분자라고 하지.”

싱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모두들 웃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지? 밍이 두고 간 건데? 버리라고 내놓을까?”

젠이 싱크대 상판만큼이나 두꺼운 판자를 한쪽으로 내놓았다. 판자에는 밍이 사용하던 물감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아니, 어디 쓸데가 있을 거야. 일단 놔둬 보자.”


“그럼, 국이가 쓰던 건?”

모두들 짙은 밤색의 커다란 캔버스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 가방은 2년 전에 죽은 국이의 가방이었다. 국이는 죽기 10여 년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진즉에 골수분자 모임을 떠난 것 같은데 가방을 끝내 찾아가지 않고 남겨 둔 채로 죽었다. 잠시 침묵이 있었고 국일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가방을 소파 옆 공간으로 옮겨놓았다. 국이와 친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늦었지만 밥 먹자. 이사한 날은 짜장면이잖아.”


“가다가 먹어. 여기 먼지 구덩이라서. 얼른 정리하고 끝내자고.”


다행이었다. 이사로 인해 나도 피곤했다. 싱의 말에 그들은 부지런히 뒷정리를 마치고 모든 불을 껐다. 출입문이 잠기는 소리가 나고 희부연 어둠이 실내에 차올랐다. 벌써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30년쯤 전, 난 이십 명 남짓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수와 젠, 싱과 율, 그리고 국일과 남게 되었다. 다섯 명 이외의 사람들은 멀리 외국으로 떠나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으며 죽기도 했다. 물론 난 그들의 말을 통해서 모든 일들을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생각마저 알게 되는 믿을 수 없는 나무 시계가 되었다.

수의 말대로 나는 정말 영물이 된 것일까? 그러나 소파와 거울, 그리고 나무 테이블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한 번도 대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골수분자 5인도 내 얘기를 들을 수는 없다.

난 이 작업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입이 무거운 아주 괜찮은 나무 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