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 - 엉기다
내 기억의 시작점은 서울 변두리의 한 중학교였다. 그때만 해도 애들이 넘쳐나던 때라 어느 골목에서나 운동장에서나 애들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일과가 끝난 오후였지만 애들은 여전히 운동장에서 축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주 5일 근무제 시행이 되기 전이었다.
“모두 다 오신 거죠? 일단 연필로 시작을 할게요. 스케치북 이젤에 놓으시고 마음대로 선을 그려보세요.”
긴 생머리를 뒤로 묶은 채 팔짱을 낀 여자는 부드러운 소리였지만 명령했다.
“아유, 미술 선생님하고 우린 다르잖아요. 선을 어떻게 그려요?”
나이가 50은 넘어 보이는 머리 벗어진 남자였다.
“그냥 그리시면 돼요. 이렇게요. 가늘고 굵게, 짧고 길게, 직선, 곡선 다 아무 상관없어요.”
긴 생머리가 앞에 있는 누군가의 스케치북에 선을 북북 그었다.
“아, 그렇게요. 미술 선생님이 다르네요.”
이번엔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가 자신의 스케치북에 조심스럽게 선을 그었다. 4B 연필이 지나간 자리는 생각보다 진하고 굵었다.
“우리 호칭 정리를 할까요? 너무 길잖아요. 저는 그냥 밍이라고 불러주세요. 윤리 선생님은 율, 수학 선생님은 수, 역사는 역 어때요?”
“역시! 선생님다운 생각이네요. 그런데 미술이면 미지 왜 밍인가요?”
키가 멀대 같이 크고 안경을 걸친 젊은 남자가 물었다.
“미라고 하면 일반 이름 같잖아요. 그래서 이응을 하나 붙였는데 이상한가요?”
“아, 아닙니다. 좋아요. 그럼 국어 선생님 두 분은 어떡하죠? 국일, 국이인가요?”
“그게 좋겠네요. 재미도 있고, 과목으로 부르면 제일 정확하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호칭을 정했다.
그곳은 중학교의 미술실이었고 모인 사람들은 교사들이거나 혹은 행정 직원이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림을 그리는 동호회가 결성된 것이었다. 강사는 미술 선생인 밍이었고 나머지는 다 비전공자였으며 토요일 오후나 혹은 일요일에 모이는 모임이었다.
“학교에 말씀은 드렸지만 당연히 좋아하진 않죠. 공무원들이란 정해진 것 외에 어떤 것도 싫어하잖아요? 우리도 공무원이지만.”
밍이 긴 머리를 풀어서 흔들다가 다시 묶었다. 중력에 의해 당겨진 두피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선을 그려봅시다. 직선이건 곡선이건 상관없어요. 죽죽 자유롭게 그리시면 돼요.”
밍의 말에 사람들은 연필로 낙서인지 선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장을 다 채워도 밍은 꼼짝 않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밍은 높낮이 없는 말로 채근했다.
“계속 그리세요. 한 다섯 장? 선의 굵기와 길이를 잘 생각하시면서요.”
“다섯 장 다 그렸는데요?”
20대 후반의 여자가 피곤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고 일어나 자신의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스케치북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미로의 연속이었다. 밍은 한숨 같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율, 좋아요. 다들 무서워 마시고 죽죽 그리세요. 우리가 이 스케치북 안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마음대로 그리시되 털선은 자제하시라고요.”
“털선요?”
“예, 짧게 짧게 끊어진 선이요. 웬만하면 한 번에 가시라는 거죠.”
밍은 또 앞에 있는 사람의 스케치북에다 끊어진 털선을 그려서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아하 하는 표정으로 다시 선 그리기에 몰두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자신들이 그린 선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털선은 여전히 털선을, 미로는 여전히 미로를, 빽빽한 직선은 사납게 직선으로만 달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흩어졌고 뒷정리를 위해 몇 사람이 남았다. 미술실은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낮에도 전등을 켜야 했고 저녁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그림에 빛이 중요하긴 한데 상황이 이러니 뭐 어쩌겠어? 차민애 선생님은 그림을 그렸으니 잘 알겠네.”
차민애는 행정 직원이었기에 담당 과목의 첫 자로 부를 수 없었다.
“주사님도 참이라고 하죠. 다 한 글자씩인데.”
율이 빗자루로 바닥을 쓸다 끼어들었다.
“어떻게 그런 신통방통한 생각을 하셨어요? 그림 그린다는 건 내 인생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율이 감격한 듯 이야기했다. 율이니 윤리선생이라는 얘긴데 내 생각에도 윤리와 미술은 영 멀어 보였다. 율의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이 모임을 주선한 인물이 행정 주사 차민애인 듯했다.
“그림을 배우다가 멈췄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사람들 마음에는 그림에 대한 어떤 빈자리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미 수행 과제 같다고 할까?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그런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모두들 이렇게 모인 거 아닐까요?”
차민애는 체구가 작고 하얀 얼굴에 이목구비도 작아서 초등학생 같았다.
“주사님은 전공이 성악이라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행정실에 계시면서 그림도 그리시고. 다재다능하신 건가요?”
율은 빗자루를 대강 던져놓고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건 아니고 성악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집어치우고 공무원 시험 본 거죠. 그림은 문화센터에서 한 일 년 했는데 폐강되었고요, 예술이 저를 피해 가는 것 같은데 화가 나더라고요. 음악도 못하고, 이젠 그림도 못 그리나 내가? 그런 마음이었어요.”
생각보다 차민애의 말소리는 야무지고 기운차서 초등학생 안에서 다른 인격이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일의 주동은 참과 수니까 잘해 봐요. 그림에 대한 원초적 본능이랄까 그런 걸 깨워 보자고요.”
밍의 말에 이젤을 정리하던 수가 빙긋 웃었다. 그는 수학 선생이란 얘긴데 정말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생겼다.
밍이 머리를 다시 묶고 나서 테이블에 놓인 나를 발견했다. 밍의 눈은 작았지만 선명한 빛을 뿜어내서 주눅이 들었다.
“참 특이한 시계네요. 생긴 건 둔탁하지만 나무라서 그런지 따스한 느낌이에요. 머리에는 새를 목각으로 해서 붙인 게 나름 귀엽기도 하고요.”
밍이 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비싸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주문하고 아무 연락도 없어서 잊어버렸나 몇 번이나 전화했었다니까요. 전활 잘 받지도 않더니 대뜸 강원도에 있는 공방이래요. 왜 그렇게 서두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아니, 내가 해외 주문 한 것도 아니고, 기가 막혀서. 어떻게 잘난 척을 하는지 작가라는 그 면상 한 번 보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보긴 했어요. 시계를 직접 가지고 왔더라니까요? 작품 배달은 직접 한다나 뭐. 하여간 우여곡절이 많은 시계예요. 이게.”
이야길 들어 보니 나를 주문한 것은 율이었다. 나는 율의 얼굴을 자세히 올려다보았다. 각진 얼굴에 눈과 코와 입이 다 길고 폭이 좁아서 전형적인 동양인의 얼굴이었으나 흰 피부에 얹힌 주근깨가 서양의 말괄량이 소녀를 연상케 하는 복잡한 조합이었다. 생김새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나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인 율이 좋았다.
“좋은 걸 마련해 주셨네요. 우리 마스코트로 하면 어때요? 시계면 시간과 관련된 물건이니까 우리의 여정과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고.”
“그렇죠. 부적 같은 느낌?”
율이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수는 그저 말없이 가만히 웃기만 했는데 난 그런 수가 궁금했다.
“율, 부적이 뭐예요. 표상, 혹은 밍이 말한 것처럼 마스코트 그런 거겠죠. 우리 모임에 끝까지 함께 하기로 하는 그런 상징적 물건이랄까.”
참의 자기 다운 설명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그들은 미술실 한쪽에 있는 아주 오래된 이젤에 나를 세워놓고 어둠이 쌓인 밖으로 나갔다. 미술실 문이 닫히고 난 혼자가 되었다. 구석에 모아져 있는 몇몇 썩은 이젤들에는 먼지가 쌓였고 사람들이 사용하고 접어놓은 이젤은 반들거렸다. 내가 놓인 곳도 먼지 속이었지만 특이한 이들의 모임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난 그들의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