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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Jul 10. 2024

6755호실 (2)

젠과 국일

작업실에 제일 먼저 오는 사람은 언제나 국일이었다. 그녀는 국어를 가르쳤고 시를 써서 문단에 데뷔한 작가였다. 세 권의 시집을 자비출판으로 냈지만 다 합쳐서 열 권 정도가 팔려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국일은 몸매가 뛰어나게 좋아 어떤 옷을 입어도 멋지게 소화해 냈다. 나는 국일이 국어선생이 아닌 패션모델을 했으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곤 했다. 그럼 시집을 낼 일도 망할 일도 없었을 텐데. 

국일이 먼저 온다고 해서 그림을 먼저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 다른 사람 그림을 구경하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면서 한두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그렇게 놀던 국일이 물감을 짜기 시작했을 때 젠이 들어섰다. 젠은 가장 늦게 오는 편이었는데 유난한 날이었다. 


“무슨 일?”

국일이 표정은 놀랐으나 반가움을 섞어 물었다. 


“며칠 전에 찍은 꽃 사진이 있어서 그걸 빨리 그려야겠더라고. 감정 식기 전에.”

젠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젤 옆에 사진을 붙였다. 벚꽃이 구름처럼 몰려있는 사진이었다.

저걸 어떻게 그리려나 잠깐 근심이 되었다. 그러나 젠의 그림 방식을 봐 온 나는 안심했다.

국일이라면 꽃잎 하나하나 그리느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겠지만 젠은 아마 순식간에 휙 날려 버릴 것이다. 

국일이 사진을 보러 젠 옆으로 오자 젠은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졸리다고 눈을 비볐다. 


“남편이 일본에 공 치러 갔는 데 따라갔었거든. 괜히 갔어. 벚꽃은 여기도 지천인데 말이야.”

젠의 피곤한 말투에 국일은 어? 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커피 한 잔 마실 거냐고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자고 올게.”

젠은 서 있는 국일의 어깨를 툭 치며 샤넬 로고의 가방을 들고 방으로 갔다. 아마 저 가방을 베고 소파에서 잘 모양이었다. 가방 없이 올 땐 두루마리 휴지를 베개 삼아 자곤 했던 젠이었다.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젠을 바라보며 국일은 풋 하고 웃었다.

 

‘어쩐 일인가 했네. 부자는 달라. 명품 백을 베고 잠도 자고.’

젠은 영어 선생이었으나 일찌감치 퇴직을 했다. 남편이 젠이라는 인테리어 업체의 사장이었기에 젠이라고 불렸다.

 

“젠? 불교의 선(禪)에서 나온 말이라나? 그냥 조용, 정지, 고요 뭐 그런 거라는데 난 관심 없고요. 젠이나 첸이나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요. 난 가톨릭이고요.”

젠의 말에 모두들 웃었다.

      

나는 젠의 남편을 본 적이 있다. 언젠가 젠이 작업실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취해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들어선 것이다. 젠이 왜 혼자 아무도 없는 평일의 작업실에서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를 마시고 취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난 후 젠의 남편이 왔다. 그는 마치 젠이 연락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젠의 남편은 삐걱거리는 문을 두어 번 흔들어보더니 한 마디 했다. 고쳐야겠군. 


“여보, 가야지. 얼마나 마신 거야?”

남편이 흔들어 깨우자 젠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올려다보곤 히죽 웃었다. 나는 너무나 멀끔하게 생긴 젠의 남편을 보곤 기분이 좋았다. 이곳에 드나든 사람 중 인물이 좋기로 두 번째인 남자였다. 

생긴 것으로 따지면 수가 단연 톱이지만 수는 상당히 여성적인 남자였다. 그런데 젠의 남편은 남성미가 넘치면서도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저런 남편을 두고 젠은 왜 혼자 술을 마시고 엎어진 것일까? 궁금했지만 언젠가는 알아질 것이기에 잠자코 있었다.

 

“어딜 가?”

젠은 거의 코맹맹이 소리였다. 젠의 평소 말소리는 맑았고 상냥했기에 그녀의 코맹맹이 소리는 굉장히 도발적으로 들렸다. 젠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젠을 부축하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다시 젠을 소파로 데리고 가서 앉히고는 마시고 난 맥주 캔을 치우기 시작했다. 소파가 있는 쪽에서는 젠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달이 설핏 얼굴을 디밀었다. 제법 깊어가는 밤이었다.

 

그날 이후에도 젠은 가끔씩 혼자 작업실엘 왔고 대개는 커피를 마셨지만 혹은 맥주를 한 캔 정도 마시기도 했다. 젠은 맥주 한 캔으로도 잠시 동안 졸았고 조금 머물다가 갔다. 어떤 때는 노래를 하기도 했는데 거의 곡조가 없는 흥얼거림이었고 그 흥얼거림에 하마터면 내가 잠이 들 것 같은 자장가 같았다. 젠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이었다. 

     

“다 잤어요? 세상에 명품 백을 베고 자는 사람 처음 보네. 누구는 비 올 때 껴안고 뛴다는데.”

뭔가 붓질을 하다가 인기척에 돌아본 국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젠을 맞았다. 젠의 얼굴에는 백의 어딘가에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아이 씨, 자국 나면 2박 3일 가는데.”

젠은 얼굴을 격하게 두드리며 웃다가 국일의 캔버스를 들여다보았다. 국일의 캔버스에는 강원도에나 있을 법한 미송이 대여섯 그루 그려져 있었다. 마치 금방 가져다 심은 소나무처럼 캔버스의 그림은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었다. 


“하여간 대단해요. 난 하라고 해도 못할 거야. 아마 그대는 피카소처럼 고양이 털 하나하나도 다 그릴 수 있을 걸?”

젠이 커피를 가지러 사무실로 들어가며 국일의 그림을 칭찬했다. 

사실 국일의 그림은 사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묘사가 탁월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그림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국일의 그림은 솔직해서 충분히 알아보고 즐길 수 있었다. 


“저는 젠의 그림이 너무 부러운 걸요? 글쎄, 기초가 없어서 그런지 젠처럼 대담하게 생략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국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젠은 큰 소리로 웃었다.


“기초는 무슨. 우리 다 밍한테 배우기 시작한 거 아닌가? 거기서 거기야. 난 묘사할 실력이 없으니까 그냥 뭉뚱그리는 거고.”

젠은 잠을 자고 나서 그런지 들어올 때 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커피 잔을 한 손에 든 채로 작업실을 왔다 갔다 했다. 넓지 않은 작업실에서 키가 제법 큰 젠이 돌아다니는 것은 조금 불안해 보였다. 저러다가 옷감에 물감을 묻히지 싶었다. 세워진 이젤마다 캔버스가 올라가 있고 이삼일 전에 칠한 유화 물감은 미처 마르기 전이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림 그려? 늘 궁금했지만 이제 물어보네. 시가 굉장히 좋던데.”

젠의 느닷없는 시 이야기에 국일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 젠. 왜 그래요? 난 시로 망했다니까. 괜히 돈만 날렸어. 맘만 상하고. 누가 읽기나 해야 말이지. 아니 무슨 시를 좋다고 하는 건데?”

젠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국일은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젤 옆에 오랫동안 붙어 있는 소나무 사진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그리느라 말이 허공에 돌았다.


“내가 왜 시를 안 읽는다고 생각해?”

젠의 말은 차분했지만 다분히 시비조였다. 당황한 것은 국일이었다. 


“저기 시집이 있잖아. 내가 그걸 얼마 전에 읽었거든.”

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그동안 전시한 팸플릿과 몇 권의 수필집, 그리고 싱이 매달 사들고 오는 미술잡지가 꽂힌 작은 책장이었다. 국일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책장을 훑었다. 


“아니, 웬일이야.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다 치운 줄 알았는데.”

두께가 얇아서 얼른 눈에 띄지 않지만 울트라 마린의 푸른빛으로 띠를 두른 국일의 시집이었다. 


“에이, 우리 집에도 있어. 우리가 다 그대 시집을 산 것 같은데? 사인해서 줬잖아.” 

순간 국일의 표정이 굳었다. 


“아, 그랬었죠.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때도 읽긴 했는데 기억은 안 나지. 그런데 지난 월요일에 와서 보니까 저 시집에 ‘딸에게’라는 시를 쓴 게 있더라고. 그냥 읽었고, 좋았다고. 뭘 그렇게 긴장해. 그대답지 않게.”

젠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작업실을 서성거렸고 마침내 커피를 다 마시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 이젤의 캔버스에는 아직 아무 물감도 얹히기 전의 백색 천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있었다.

 

“그 시를 보니까 딸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벚나무 아래에서 뛰는 아이를 그리려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네.”

한숨 쉬듯 말을 흘리는 젠의 소리가 국일의 귓가에서 맴돌았다. 


‘젠이 딸이 있었나? 아이가 없어서 맨날 둘이 놀러 다닌다더니.’

갑자기 국일의 마음속 이야기가 내게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맞다. 현재 이 작업실에 있는 사람들 중 아이가 없는 사람이 둘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젠이고 하나가 아직 노처녀인 율이었다. 


“왜? 아이 없는 사람은 뭐 애도 못 그려? ”

젠이 다시 놀리듯 국일의 얼굴을 보며 킥킥거렸다. 목이 유난히 길고 좁은 어깨를 가진 젠의 뒷모습을 보며 국일은 잘못한 사람처럼 눈만 끔벅거렸다. 


“그게 아니고, 내가 시를 쓸 때 무슨 소리를 썼나 궁금해서 그래요. 한 번 봐야겠네. 헛소리한 게 분명할 테니.”


“아니지. 시를 쓸 땐 진심이었겠지.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그림도 그렇잖아. 진심으로 시작하지. 결국엔 사기로 끝나지만.”

젠은 웃으며 자신의 캔버스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곧 도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림은 담 주부터 할까 생각 중.”


“왜 어디 가요? 토요일에도 안 나올 모양이네.”

젠은 찌그러졌다가 다시 모양을 잡은 명품 가방을 어깨와 목에 두른 에르메스 스카프 위에 아무렇게나 걸쳤다. 내가 보기엔 젠이나 국일이나 패션 감각이 남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좀 다른 분위기로 각각 멋졌다. 


“크루즈 갈 예정. 동남아인지 일본인지 다녀오자고 하네. 생일 기념이라나.”

젠의 말에 국일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참 배려가 남다르셔.”

국일의 말에 젠은 큭 웃으며 손짓으로 인사하고 떠났다. 


젠이 나가자마자 국일은 책장으로 가 자신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벌써 10여 년 전에 발행한 초판이었다. 목차를 죽 짚어나가다가 ‘딸에게’를 발견하곤 페이지를 펼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써 놓은 거야.’

그녀의 마음속 소리가 내게 궁금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국일은 심란한 표정으로 책을 덮더니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이제 이곳에선 아무도 그 시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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