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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개나리와 진달래

by 안개인듯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자주 안 나오셔서.”

관리인이 빗자루를 들고 일부러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의 쓰레받기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나는 관리인이 이렇게 열심히 공원 구석을 쓸어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바쁘진 않죠. 늙다 보니 몸이 그냥 여기저기 고장이 나네요.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화구를 늘어놓아 영업이 시작됨을 알렸다.


“그런데 화가님, 손님이 너무 없는데 어떻게 생활은 되세요?”

관리인이 내 걱정을 하다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질문이 편하진 않았다. 하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관리인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을 지나다니고 나와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입 밖으로 내놓진 않았지만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묻고 싶었을 것이다. 부자세요? 아니면, 뭐 먹고 사세요?


먹고살 만큼은 남편이 벌어놓았네요. 그냥 나와 있는 거죠. 관리인님이 깨끗한 공원을 청소하시듯 말이에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관리인은 그저 네, 네 하는 표정으로 대답하곤 초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초소는 이전과 달리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마치 놀이 공원에 있는 장난감 집처럼 빨간색 지붕에 초록색 몸통을 가졌고 작고 앙증맞은 창틀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언제 초소 리모델링이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은 새로웠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의자도 밝은 노란색이었다. 멀찌감치 보기에는 그 모든 게 레고로 만든 장난감집 같았다.


초소가 예뻐졌네요. 보기 좋아요.


관리인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돌아보며 싱긋 웃더니 역시 소리쳤다.


“그 총각이 칠해줬어요. 페인트 회사 다니는 친구랑 같이 와서요. 지난 일요일에요.”


누구요?


“그 왜 맨날 여기 와서 커피 마시는 총각 있잖아요. 빨간 바지, 파란 바지 입고 오는.”

제 엄마가 화가라는 그 청년인 것 같았다. 나에게 여준이냐고 묻던. 청년의 유난한 바지 색깔은 관리인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의 현란한 원색이었던 것이다.


제법이네. 무료 봉사도 할 줄 알고.


초소에서 시선을 거두고 먼 하늘을 보고 있는데 언덕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샛노란 개나리와 분홍색 진달래가 한 쌍으로 걸어오는 그 분위기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면서 정체가 드러나자 나는 공연히 속이 울렁였다. 샛노란 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은 청년과 실크의 부드러운 광택이 도는 분홍색 모던한 투피스를 입은 이는 틀림없이 청년의 엄마였다. 다행인 것은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말 왔네.


자기 엄마를 모시고 오겠다던 꽃분홍 바지가 오늘은 노란 개나리로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렇게 빨리 이뤄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뤄지기는커녕 잊어버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 그런 막연한 약속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투피스는 나를 보자 입을 막았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나왔던 행동인 것을 이해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그런 표정이랄까.


“화가님, 전에 말씀드린 우리 엄마예요. 엄마, 이분이 그때 그분.”

개나리는 기쁜 얼굴로 나를 대했고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소개했다. 그리고는 투피스를 남겨둔 채 초소 쪽으로 향했다. 아마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설마 했는데...... 여숙 언니 맞죠?”

투피스도 나를 여준으로 볼 줄 알았는데 정확히 ‘여숙’이라고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는 이 여자가 궁금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준에 관한 일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엉켜버렸다.


“여준 언니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단 얘길 들었어요. 아주 닮은 일란성쌍둥이라고. 정말 똑같으시네요. 아, 저는 박진희라고 해요. 여준 언니가 보통 희야라고 불렀죠.”

투피스는 곱게 늙어서 오십이라고 하기에도 젊어 보였다. 내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고 나를 본 적도 없는 게 맞을 것이다. 꽃분홍의 말로 추측해 보면 프랑스 유학 중에 여준이 만난 여럿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신 거예요?”

투피스 박진희는 내 영업장의 간단한 화구와 옷차림에 놀란 것 같았다. 말은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지만 속내는 그 꼴이 뭐냐는 거였다.


그냥 소일거리 삼아 나와 있어요.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끝없는 질문이 마치 자동 생성되는 문장처럼 뇌리에서 소용돌이쳤다.


여준이 소식은 아나요? 한국에 들어오기라도 했나요? 여전히 행방불명인가요? 혹시 여준이 남자인 외국인을 아나요? 무엇보다 살아있긴 하나요?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어 질문하기가 두려웠다.

“혹시 여준 언니 소식을 알고 계신가 해서요.”

투피스의 말에 내가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던 모양이다. 투피스는 한숨을 툭 내쉬었다.

“언니도 역시 모르시나 봐요. 십 년도 더 된 것 같아요. 소식이 끊어진 지가. 저는 언니라면 알 수 있을까 해서 아들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왔거든요. 여숙 언니가 여기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 더 그랬죠. 그런데.”

투피스의 말은 나의 오금이 풀어지게 했다. 다리가 꺾인 듯 난 벤치에 푹 주저앉았다. 내 행동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살피던 투피스는 한참이나 뜸을 들인 다음에 입을 열었다.

“언제고 이 동네에 여준 언니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저도 해요. 여기 이야길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럼 혹시 기다리고 계시는 건가요?”

투피스의 말에 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아니, 맞아요.


뭐가 뭔지 나도 내가 의심스러웠다. 이 모든 상황이 증강현실 같았다.

그러는 동안 멀리서 개나리 셔츠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언제 다녀왔는지 한 손에 얼음 커피를 들고 있었다. 걷어 올린 노란 셔츠 소매로 가느다랗고 흰 손목이 여자애의 것처럼 비어져 나와 있었다.

“얘기 다 하셨어요? 그런데 화가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무슨 일이야 엄마?”

개나리는 자기 엄마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취조조로 물었다. 투피스는 아들의 말은 귓등으로 들었는지 아무런 대답 없이 목례로 마무리했다.

“다음에 자리 한 번 만들게요. 여기는 아무래도 개방된 장소라서요. 아들이 자주 온다니까 아들 편에 연락드리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개나리를 잡아끌어 팔짱을 낀 채 진달래 투피스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멀어져 가는 노란빛과 분홍빛이 마치 조화 꽃다발처럼 건조해 보였다.

투피스가 말한 ‘다음의 자리’는 당연히 기약이 없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실행된다고 해도 내가 응답할 생각은 없었다. 투피스가 여준에 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십여 년 전이고 나 또한 그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금해도 다른 사람을 통해 여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알 수 있는 어떤 경로도 없었으니 아이러니였다.

“화가님, 냉커피 한 잔 하실래요? 날이 더워지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목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관리인이 다가왔다. 뭔가 힘든 일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다.

괜찮다고 관리인의 커피를 사양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한 감정이 솟았다.


뭐지? 왜 자꾸 나를 초소로 초대하는 걸까?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으나 나의 예민해진 신경이 관리인을 색안경 끼고 보게 만들었다. 그런 모든 상황에 화가 났고 그 여파는 보이지 않는 여준에게 미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화나게 할 거니? 너는 살았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차라리 죽었다는 소문을 접하게 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있는데 관리인이 투명 플라스틱 컵에 냉커피를 담아왔다.

“화가님이 힘들어 보이네요. 달달한 게 어떤 때는 아주 괜찮답니다.”

관리인은 내 옆에 커피를 놓아두곤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피곤할 때 달달한 커피 마시면 개운하지.

어디선가 시어머니의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들며 관리인의 커피를 들여다보았다. 믹스 커피를 더운물에 녹여 얼음을 잔뜩 넣은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일부러 얼음을 얼려 온 것이 분명했다. 더운 날이었으므로.

관리인의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하자 잠이라도 올 듯 까부라져가던 몸이 서서히 살아났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 사라진 관리인의 뒷모습을 향해 건배했다.

우리의 무익한 일상을 위하여!

공연히 눈시울이 시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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