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같은 여자를 공원에서 또 만나지는 못했다. 일부러 비슷한 시각 같은 요일에 공원에 올랐으나 헛일이었다. 운동하는 노인들 사이에는 다시 이전의 평화와 느림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여자의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되는 게 느껴졌다. 특히 할머니들의 관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슬금슬금 내게 다가와 말을 거는 할머니가 더 그랬다.
“운동할 상이 아니야. 그 몸으로 운동은 언감생심이지. 내 팔뚝 정도는 돼야지.
할머니는 팔뚝뿐만 아니라 복부비만도 제법이어서 운동의 효과가 있는지 궁금했다. 할머니의 전체적인 몸은 늘어진 자루 같았는데 신기하게도 기구를 골고루 다뤄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답을 찾기 어려웠다. 저 정도의 운동이면 탄탄한 근육을 갖춰야 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운동을 등한히 하는 내게 위로가 되었다. 할머니 몸이나 내 몸이나 비슷했으니까.
“왜요? 할머니도 그 부인을 보고 싶으세요?”
나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할머니는 잠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주목했는데 그 눈빛이 짓궂었다.
“그러는 화가 선생은 보고 싶었던 모양이네.”
“네, 보고 싶은데 안 오시네요. 다른 데 가셨나.”
나의 대답은 진심이었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뭐가 그리 보고 싶을까 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 주제를 놓고 싶진 않은 게 분명했다. 인형 닮은 여자가 궁금한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이 실실 웃어가며 하던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여자에게 팔운동을 가르쳤던 근육질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날로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추위에도 소매가 없는 운동복을 입고 팔목에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드러난 근육에 핏줄이 선명했다. 아마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젊은 보디빌더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거, 너무들 빤히 쳐다보니까 무렴해서 못 오는 거지 뭐. 사람들이 눈치가 없어요. 운동하러 온 사람을 뭘 그렇게 원숭이 보듯 해.”
할아버지의 관심 주제도 우리와 같았다. 왜 모두들 한 번 봤던 그 여자를 지우지 않고 기억해 내는 것일까. 장담할 수 없지만 한 번으로 관심을 끄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라고 난 편하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바닥에 놓여 있던 5킬로그램짜리 덤벨을 양손으로 들고는 자신의 운동 장소로 걸어갔다. 쓰고 제 자리에 놓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한 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곳은 덤벨이 있을 장소는 아니었는데 누군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곤 방치한 것이 틀림없었다.
“저 영감탱이 아니면 여기가 엉망일 거야. 회장님이셔.”
묻지도 않았지만 자루 할머니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시청에다가 엄청나게 민원을 넣어서 여기가 운동 시설이 들어왔다고 해. 저 영감 사는 데는 새 아파트라 헬스장도 다 있다는 데 굳이 여길 오는 건 뭐지? 그랬어. 첨에는.”
자루 할머니는 아예 운동을 그치고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할머니에게서 땀내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지만 나쁘지 않았다. 어릴 적 엄마에게서 맡았던 어떤 냄새와 비슷했다. 할머니들은 공통된 냄새가 있을까? 나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날까?
“저 양반이 저래 봬도 폐가 안 좋대. 그래서 실내보다는 여기처럼 산이 있는 곳에서 운동해야 된다고 하더라고. 저번엔 기구에 앉아서 멍청하니 하늘을 보고 있더니 소리를 지르는 거야. 운동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기합을 넣어서 치매 온 줄 알았어.”
할머니의 이야기는 끊어질 기미가 없었다.
“왜 소리를 지르셨대요?”
궁금한 대목이긴 했다. 왜 하늘을 보고 기합을 넣었을까.
“어, 뭐라더라. 자기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거라나? 하여간 대책 없는 영감이긴 한데, 여기 산에서는 선생이지. 모르는 게 없어.”
할머니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할머니가 다가와 끼어들었다. 품격이 느껴지는 키가 큰 초로의 부인이었다.
“제가 듣기엔 그 예쁜 여자분이 안 와서 실망하신 고함이라고 하던데. 총무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굉장히 기다리시는 것 같다고.”
품격 부인은 상당한 비밀인 듯 아주 작게 말을 했다. 그러나 자루 할머니와 나에게 그녀의 소리는 정확히 들렸고 나는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아니, 얼마나 봤다고 소리를 지를 정도라는 걸까. 역시 자루 할머니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 말도 안 되는 얘길 했네. 총무가 일은 잘하는데 촐랑거리고 낄 데 안 낄 데 다 끼지. 총무가 회장님 소리 지를 때 옆에 있기라도 했다는 거야? 물어봤대?”
자루 할머니는 품격 부인이 잘못이라도 한 듯 따졌다.
“매일 소리 지르신대요. 누굴 부르는 것처럼. 전엔 안 그러셨다는데. 그래서 장난으로 토끼라도 부르세요? 하고 물었더니, 어떻게 알았어? 토끼보다야 이쁘지, 그러셨다는 데요? 정색을 하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회장 할아버지의 아쉬운 마음이 만져지는 듯했다. 소리 지르는 이유가 인형 여인이든 토끼든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라면 과연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는 것도 맞는 얘기였다.
<너는 누군가를 목청껏 불러본 적이 있니?>
찬바람이 잠깐 목덜미에 스치더니 소름이 돋는 느낌이 온몸에 일었다. 햇볕은 쨍쨍한데 드는 생뚱맞은 이 한기는 감기의 시작과 비슷했다.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 이야기 중인 두 할머니를 떠나 한쪽 구석에 지어진 간이 휴게실 앞을 지날 때였다.
열려 있는 문으로 정수기와 온열기가 눈에 들어왔다. 물 끓이는 주전자도 있고 휴지통 옆에는 일회용 커피의 껍질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휴게실 안에서는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이 물이나 커피를 마시며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건너편 노인에게 손짓을 하며 문을 닫으라고 했다.
“땀 내고 찬바람 맞으면 감기 와. 조심들 해야지. 그런데 회장님은 왜 저렇게 벗고 있는 거야? 이 겨울에. 나 참.”
못마땅한 소리가 문으로 흘러나왔다. 그들은 회장님의 민소매 차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문을 닫지 않아서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거야 그 여사님 올까 하고 준비하고 있는 거지 뭐. 저 형님이 생각보다 순진하다니까. 그런데 뭐, 또 오겠어? 구경거리 될 텐데.”
“그래도 모르지요. 자기를 봐주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리고 또 보는 게 뭐 잘못인가요?”
“잘못은 아니지만 그렇게 대놓고 훑어보는 건 아니지. 그 여사님은 우리가 보는 게 상당히 불편한 것 같았어. 그래서 안 오는 거겠지.”
“아니, 그럼 펑퍼짐한 추리닝에 솜 파카 걸치고 오면 되지. 그렇게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오는 게 날 보러 와요 하는 게 아니면 뭐야? 나도 보니까 좋던데 뭐.”
“아니, 뭐가 좋아요? 다 늙어서 참 주책이네.”
“거, 그렇게 얘기하지 말아요. 누가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잖아. 예쁜 꽃을 보면 그냥 지나쳐? 들여다보잖아. 여기 돌아다니는 토끼도 귀여워서 사진도 찍고 하잖아. 그런 거야. 무슨 흑심을 품고 보는 건 아냐.”
“하여간, 그 여사님이 다시 못 오는 건 우리 책임이 크긴 해요. 회장님이 저렇게 기다리는 것도 안 됐잖아요.”
“기다리긴 누가 기다린다고 해? 그럴 거면 그 여자 사는 아파트 입구에 가서 기다리면 될 일이지. 거 무슨 팰리스 거기 산다며? 그렇게들 말하지 말아요. 회장님은 그냥 소리 지르는 거야. 일종의 호흡이지 뭐. 다들 다시 나가자고.”
그들이 밖으로 나와 운동을 다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잠시 후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기합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내 귀에까지 들렸다. 짧고 굵은 소리는 누구를 부르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짜 회장님이 운동을 시작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길 바랐다.
정말인지 아닌 지 알 수 없는 회장님의 기합소리가 인형을 닮은 그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길. 그럴 리가 없길. 어떻게 한 번 본 사람을 그렇게 지극한 소리로 부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순간 번개 치듯 여준이 생각났다.
파리에서 여준이 자신을 던져버리게 했던 중동계 남자의 노래.
처음 들었던 노래가 여준을 그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했듯이 첫 만남의 강력함이란 게 있을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경험하지 못했던 그런 일들이 세상에서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가.
만일 여준도 그 남자를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회장님처럼 소리를 지르며 찾았을까. 하지만 그 한 번이 여준 인생을 그르친 시초였다면 그 만남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회장님은 인형 같은 여자와의 만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복이야.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과연 그게 복일까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인간이란 어떤 한 대상을 향해 부나비처럼 날아올라 타버릴 수도 있는 존재니까. 드물긴 해도 없는 일은 아니니까. 설사 목숨을 건 비상이 꼭 불행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일이니.
기운 빠진 내 발끝에 작은 돌멩이가 닿자 비칠거렸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 끝에 나도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감당할 만한 기운이 있으니 찾는 거겠지. 와 주면 좋겠다. 그 인형 여인이.
그냥 한 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