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아의 집에서 한 달을 묵었다. 사위와 손주가 함께 있어서 그나마 정상적인 시간을 회복한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깨끗이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었다. 루아가 미리 손을 쓴 것인데 어차피 남편의 물건은 요양원에 들어갈 때 정리했기 때문에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이 사용하던 서재에 오래된 사진 액자가 몇 점 걸려 있었고, 낡은 성경책은 여전히 낡은 채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가 앉았던 방석도 그대로였다.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생각보다는 견딜 만했다.
집을 내놓으려고 부동산 번호를 찾는데 문자 메시지가 스무 통 가까이 와 있었다. 모두 다 같은 전화번호인 것으로 보아 조이상의 문자일 것이다.
작년 겨울의 끝 무렵부터 공원엘 가지 않았으니 거의 사 개월 동안 조이상을 만날 일이 없었다. 문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조이상의 선한 눈매가 생각났다.
<화가님, 선글라스 사놓고 아직도 전달을 못했네요. 이젠 여름에나 쓰셔야겠어요.>
<화가님, 점심시간마다 공원에 올라가는데 뵐 수가 없네요. 다시 그림 그리시는 모습 보고 싶어요.>
<화가님, 오늘은 버스킹 공연이 있었어요. 이름 없는 젊은 가수가 하는데 아주 훌륭했거든요. 함께 보셨으면 좋았을 걸요.>
<화가님, 어린이집 꼬마 있죠? 지향이라고 하던데. 저와 친해졌어요. 화가님 보고 싶대요. 방학 끝나면 화가님 오냐고 물어봤어요.>
<화가님, 공원 관리인 아저씨가 화가님 의자 만들었어요. 곧 오실 거래요.>
<사람들이 저한테 화가님 아들이냐고 물어요. 닮았대요.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맨날 저한테 물어보나 봐요. 하긴 제가 매일 가서 그렇겠죠?>
<화가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공원 아래 ‘소소어패럴’이 저희 사무실인데 오셔서 이상 대리를 찾아주세요. 혹시나 하고 기다립니다.>
<어느새 봄이 오고 있어요. 산수유가 노랗게 피고 있네요. 화가님, 어디로 가셨나요?>
<화가님, 오늘 공원 헬스장에 미인 한 분이 오셔서 회장님 할아버지가 커피 쏘셨어요. 저도 한 잔 얻어 마셨답니다.>
<이 공원의 모든 사람이 화가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떻게 아냐고요? 모두들 저에게 물으니까요. 언제 오신대?>
<화가님, 토끼가 한동안 안보이더니 새끼가 여러 마리 생겼어요. 너무 예뻐서 아이들이 소리를 막 지른답니다. 그런데 도망가지도 않고 아이들을 쳐다봐요. 애완토끼인가 봐요.>
<화가님, 어떤 부인이 관리인에게 화가님을 물었어요. 딸과 손녀를 데리고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오셨는데 화가님 오시면 알려달라고 연락처를 주셨대요.>
<화가님을 만날 것 같아 작년의 초록색 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역시 안 계시네요. 보고 싶어요. 화가님.>
조이상의 문자를 읽고 있으니 마음속의 구멍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은 구멍을 말랑말랑한 흙으로 채워 파릇한 싹이라도 틔워낼 것 같았다. 남편이 없다는 상실감이 한쪽으로 치워지고 공원 이야기로 채워졌다.
부동산도 들르고, 공원에도 가려고 길을 나섰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과부가 되었다는 생각은 나를 주눅 들게 해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남편 죽은 여편네가 어딜 돌아다니느냐는 시선을 받을 것 같은 마음에 우울해졌다. 내가 이렇게 봉건적인 사고를 가진 여자였던가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남편이 죽은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 사실은 나를 여전히 목메게 했다. 길을 걷다가도 울컥울컥 해서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기대어 있곤 했다.
부동산을 여럿 지나쳤지만 어디도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곧바로 공원으로 향했다. 화창한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이전보다 잦았다. 공원에서 누구라도 만나면 주저앉을 것 같아 입구의 벤치에 엉거주춤 걸터앉았다. 봄 햇살이 내려앉은 나무벤치는 온화했다.
노랑연두색의 부드러운 공기 속으로 어린 여준이 걸어왔다.
교복 치마의 길이가 너무 길다며 허리를 몇 겹으로 접어 올린 모양이 우스꽝스러웠다.
여준은 내게도 치마를 올려 입으라고 했다.
“숙, 우리가 얼굴은 그럭저럭이지만 다리는 예쁘잖아. 예쁜 건 드러내야지. 이렇게.”
치마를 올리고 까치발을 들자 흰색 팬티가 살짝 보였다.
“야, 준. 너 팬티 보여. 얼른 내려.”
나는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으나 여준은 해죽거리며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보이면 어때. 너도 나랑 같은 팬틴데 뭐. 숙, 교복 너무 구려. 우리 아주 길이를 줄여버릴까? 맨날 어떻게 걷어입고 다니냐?”
여준은 결국 내 교복치마와 자기 것을 둘 다 짧게 줄여왔다. 나는 화를 내는 척했지만 내심 짧은 치마가 마음에 들었다.
“숙,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넌 내가 좋아하는 건 다 좋아하잖아. 나도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좋아. 우린 확실히 쌍둥이야.”
교복 줄인 일이 들켜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하긴 이미 잘라버린 것을 다시 붙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우린 그냥 즐겁게 입고 다녔다.
파리로 떠나기 전 내게 잠깐 들렀던 여준의 상기된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숙, 같이 가자. 새로운 세계로 가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보는 거야. 쌍둥이 둘이 뭐가 무섭겠어? 너나 나나 불어 한 마디도 못하지만 어때? 봉주르 마드모아젤, 너는 그림이 좋잖아. 네 그림은 최고야. 따따봉!”
이야기를 들으며 어이가 없고 용기도 없던 나는 여준에게 짜증을 냈다.
“내가 무슨 그림이 좋아, 너나 가든가. 난 그냥 결혼이나 할래.”
그때 여준은 서운한 표정으로 맥없이 말했다.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결혼해도 그림은 놓지 마. 난 그냥 갈란다. 그림 그리다 심심하면 하늘로 솟든가 땅으로 꺼지든가 옵션은 많아. 내 걱정 말고. 사랑해.”
여준은 자기 행동의 결과가 낙관이든 비관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유쾌했다. 사실 그렇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모든 걸 나쁜 일로 여기지 않았던 여준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던 나는 여준을 좋아하면서 질투했다.
나와 똑같으면서 완전히 달랐던 여준은 그렇게 여러 형태로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랬던 여준이 연락두절 상태가 되자 남편은 여준이 승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마치 여준의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당시엔 코웃음을 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준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슴이 죄고 숨이 가빠지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더욱 애써 여준을 지워가려 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여준은 여전히 내게 유쾌한 웃음으로 남아 있었음을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늦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멀리서 토낀지 다람쥔지 지나가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어디선가 노래인 듯 이야기인 듯 부드러운 소리가 날아와 귀에 스며들었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곳은 또 병원이었다. 루아가 눈이 빨갛게 부어서 나를 내려다봤다.
루아는 반드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떼를 썼다.
여기에 있다가는 엄마마저 잃겠다고.
그런데 정작 나는 가장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루아의 모습이 가엾은 어린아이로 보였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루아의 보호자인 것을 강하게 느꼈다
.
“루아야. 죽음같이 강한 게 뭘까?”
루아는 속눈썹을 붙인 눈꺼풀을 부채처럼 깜박이다가 갑자기 정신이 난 듯 머리 위 호출 버튼을 눌렀다.
“루아야. 이게 답인가 봐. 아주 아련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뭐든 사랑으로 접근해야 했던 모양이야. 네 아버지나 이모처럼. 이제 내 마음의 감옥이 열릴 것 같아.”
차분히 말을 끝내고 일어나 앉으려는 데 간호사가 튀어 들어왔다.
“이상해요, 우리 엄마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정밀 검사해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