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향기에 눈을 떴다.
어디에선가 날아와 대기에 부드럽게 스며있는 라일락꽃 향이었다.
벌써 오월의 나른함과 따스함이 공기층 사이사이에 배어 있었다.
공원에 갈 준비를 하려고 부스럭대는데 노랫소리가 들렸다.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
단발머리 여준이 핑크빛 짧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빙글빙글 방 안을 돌았다.
"그 남자애가 불러 준 노래야. 좀 구식이긴 해도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 노래 너무 좋다. 그런데 라일락을 수수꽃다리로 부르면 어떨까? 순우리말 이름이잖아. 그런데 많이 웃기긴 한다. 하여간. "
흥얼거리다 깔깔대던 여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막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던 듯 나를 향해 눈을 찡긋 하고는 재빨리 나갔다. 나는 순간에 사라진 여준을 잡으려는 듯 소리쳤다.
“여준아, 여준아!”
그러나 소리는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리움만 차올랐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소파에 묻히듯 앉았다.
보고 싶다. 어디 있는 거니. 어디든 가서 보고 싶다.
여준을 향한 그리움이 번개처럼 스치면서 낯선 감정에 잠깐 멈칫했다.
내가 여준을 보고 싶어 했던 일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여준은 가깝고도 먼 존재였고 그런 여준을 그리워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은 여준이 보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으니 이상했다.
내가 정말 달라진 것인가. 화학작용에 의해 물질의 성질이 변하듯 내가 무언가에 의해서 변해버렸나.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그러면서 공원의 풍경이 잔잔하게 펼쳐졌다.
바구니 가득 양배추와 당근과 귀리 봉투를 들고 토끼를 향해 가는 관리인.
분홍빛 볼을 가진 지향이가 두 팔 벌려 뛰어오던 모습.
천천히 운동 기구를 다루며 웃고 떠드는 노인들.
바비 인형을 닮은 기다란 몸매의 여인.
노래하는 남자 때문에 울고 웃던 여인의 흰 원피스.
초록색 바지를 입고 환하게 웃던 조이상.
이 공원이 당신에게 선물이라며 웃던 내 남편.
그림이 답이라며 까칠하게 내몰던 루아의 심술스러운 얼굴.
그리고
함께 공원을 오르내리던 어릴 적의 여준. 여준.
모두 어우러져 춤추듯 너울거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만지려고 하자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연보랏빛의 라일락꽃만 잔상으로 남았다.
수수꽃다리.
잠시 멍하게 앉았다가 천천히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았다. 그림도구가 담긴 트렁크를 끌고 공원으로 향했다. 완만한 경사임에도 땀이 날 정도로 날씨는 화창했다. 운동기구가 들어선 공원으로 들어서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주위가 소란해졌다.
“이 대리, 이상 대리, 오셨어, 맞지? 얼른 와 봐.”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여자보다 뒤처져 있던 조이상이 손에 여전히 얼음커피를 들고 내게로 뛰어 왔다. 그 바람에 커피가 쏟아질 듯 흔들렸다.
조이상은 내 앞에 오자 급히 멈춰 섰다. 이전과 다르게 머리가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이마에서 흘러 눈썹을 덮자 손으로 쓸어 올린 조이상은 바튼 숨까지 몰아쉬었다.
“아니, 왜 이렇게 서둘러요. 넘어지겠네.”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조이상은 컵을 내려놓고 다가와 물었다.
“화가님, 한 번 안아도 돼요?”
뭐라 대답할 사이도 없이 조이상이 나를 꼬옥 안았다. 내가 안긴 것인지 조이상이 안긴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조이상의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이 밀려왔다. 조이상의 마음에는 나의 무엇이 전달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화가님, 무슨 일 있으셨죠? 너무 오래 안 오셨어요.”
조용히 조이상의 팔을 풀어놓으며 앉으라고 권했다. 조이상의 동료 서넛은 둘러서서 우리를 보다가 슬며시 떠나갔다.
“아뇨. 이젠 괜찮아요.”
내 말에 조이상은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그림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그림 그리시니 다행이에요. 타고난 건 여러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는 조물주의 부탁이래요.”
조이상의 말에 나도 가볍게 웃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조금 떨어진 초소에서 관리인이 우리를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마치 나무처럼 서 있다가 노랗게 칠해진 의자의 먼지를 털었다. 조이상이 말한 나를 위한 의자가 틀림없었다.
“뵙고 싶었어요. 건강하시죠?”
내 인사에 관리인은 놀란 표정이었으나 분명히 반가운 눈빛으로 내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토끼 먹이통을 찾아들고 자리를 떴다.
운동하는 노인들이 하나 둘 아는 체하며 지나갔다.
나는 몰랐으나 나를 알고 있었던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단 의지가 천천하나 강력하게 올라왔다.
연필을 잡고 이전처럼 손가락으로 돌려봤다.
몸의 깊은 곳에서 따스한 숨이 올라오는 듯 긴장이 풀리고 해체되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용서되고 괜찮았다.
여준아, 이 마음이 뭐니?
중얼거리는데 하늘에서 까마귀가 날았다.
<끝>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제목을 <너의 공원>으로 할까 <나의 공원>으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둘 다 버리고 시작한 이야기의 여정을 맺습니다. 이 글 묶음은 웅장하지도 로맨틱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한 노파의 일상적인 이야기였기에 제목을 걷었습니다. 그러니 읽기에 상당한 내공이 필요했을 텐데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이 계셔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제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동력을 만들어주신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이제 겨울을 맞아 저도 겨울잠을 자고 나서, 봄에 활동을 재개해 볼까 합니다. 물론 살아있다는 전제에서 입니다만.
추운 겨울 건강하게 지내시고 마음 변치 않으셔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