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에 썼다....)
청춘은 잔인한 계절이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망각의 치유력이 청춘을 아름답게 만들 뿐이다. ―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십대와 이십대의 자살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열정을 버리고,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할 정도로, 때로는 젊다는 것은 지독히 잔인할 지도 모른다.
배우 이은주의 자살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난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가벼움과 웃음의 미학(美學)만이 대세로 인정받는 요즘의 영화판과 대중문화의 흐름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음울한 내면연기는 희소함을 넘어서서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의 원인에 대해서 호사가들과 세인들은 여러 입소문을 퍼뜨렸다. 우울증은 피할 수 없는 배우의 숙명이라는 고상한 견해에서부터, 돈 문제가 얽혀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자살은 끊임없는 의문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 와중에 드러났던 한 가지 사실은 나의 이목을 끌었다. 배우 이은주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유작(遺作)이었던 영화 ‘주홍글씨’에 집착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난 다분히 위험한 책읽기를 해보려 한다. 영화 주홍글씨의 원작들을 읽어가면서 이은주의 마지막 날들을 짐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결론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위험하다’는 전제를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책이라는 간접 경험이 종종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위험천만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주홍글씨는 김영하의 두 가지 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과 『사진관 살인 사건』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제목은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The Scarlett Letter)』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감독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이은주의 자살과 김영하의 소설사이에는 긴밀한 유대관계가 감지된다. 김영하의 소설들은 죽음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의 데뷔작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자살과 자살 안내인에 관한 이야기다. 데뷔작 이후에도 김영하는 계속해서 죽음이란 주제에 침잠한다. 심지어 1997년 발표한 『흡혈귀』에서는 김영하 자신의 글쓰기를 흡혈귀의 삶에 비유하며, 자신의 글에 대해서 “죽음에 대한 무한한 찬미와 삶에 대한 도저한 허무주의” 라고 평가한다.
『거울에 대한 명상』과 『사진관 살인 사건』에서도 죽음은 강력한 모티브다.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이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죽어간다. 『사진관 살인 사건』에는 제목 그대로,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죽음은 거북스럽거나 불쾌하지 않다. 그동안 김영하가 추구해온 ‘미학적 죽음 혹은 죽음의 미학화’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만약 배우 이은주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 주홍글씨에 몰두하였다면, 원작에서 풍겨져 나오는 죽음에 대한 은밀한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미학화된 죽음을 마주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사이에서 판단력이 무디어졌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김영하는 배우 이은주가 자살한 다음날, 한 신문지면을 통해 일말의 죄책감을 고백한다.(「내 소설속의 그녀」, 중앙일보, 2005년 2월 26일) 하지만 나는 작가 김영하에게 죄를 묻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죽음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죽음이 인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68년생 김영하는 학과 동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고를 목도하면서 학생 운동의 중심부로 걸어들어간다. (김영하와 이한열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이다. 그리고 이한열의 관을 연세대에서 서울 시청 앞까지 메고 갔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작가 김영하다.) 김영하의 젊은 시절은 역사와 민족, 사상과 이념에 대한 지리한 논쟁으로 점철되었다.그러나 김영하가 그렇게 형이상학적 논쟁을 거듭하던 시기에 세상은 급변하였다. 1980년대 후반, 계속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은 대학생을 비롯한 전국민들에게 풍요라는 선물을 벼락처럼 뿌렸다. 이제 역사와 민족, 사상과 이념은 촌스럽고 낡은 논쟁거리일 뿐이다. 그리고 김영하가 꿈꾸었던 것은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김영하가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돌아보니,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이념과 역사가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비춰주는 유일한 거울은 물화된 자본주의적 삶이었다. 김영하는 이것에 맞서 죽음을 제시한다. 삶이 자본주의의 교환 가치에 따라 작동되는 거대한 체스판이라면 죽음외에 다른 어떤 선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죽음은 김영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쥐고 있는 최후의 카드다. 그리고 죽음을 제시할 수 밖에 없는 병리적 사회 현상이 김영하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김영하에게 죄를 물어서는 아니 될 것 같다. 김영하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혹은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이은주의 마지막 날들을 그려보고자 시도했던 나의 독서는 김영하의 최신작에서 멈추었다. 아마 이은주는 김영하의 최근작은 읽지 못하였을 것 같다. 아쉽다. 이은주가 김영하의 최신작을 읽었다면 그녀의 우울감이 조금은 덜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살이라는 최악의 장면만큼은 보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최근작은 종래의 우울함을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최근작인 소설집『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군상들은 연성화되었다. 극단으로 치닫던 작중 인물들의 체험은 순치(馴致)되었다. 되바라진 여중생, 일확천금을 꿈꾸는 ‘옛 운동권 동지들’, 야비하고 영악한 소시민들이 등장하여 웃음을 선사한다. 물론 그것은 냉소에 가깝다. 그러나 경쾌하다. 만화가 이우일의 일러스트레이션도 페이지 넘기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특히 말미에 등장하는 작가 김영하의 후기는 솔직하면서도 인간적이다.
“추운 날에 아내가 가자미를 굽고 있다. 온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퍼진다. 아, 또 한고비 넘었다.” (『오빠가 돌아왔다』작가 후기, 김영하, 창작과 비평사 간)
그의 가장 최신작인 『오빠가 돌아왔다』는 이렇게 끝맺는다. 죽음이라는 현대의 치명적 질병으로 번뇌하던 작가 김영하도 소소한 일상에서 쾌락을 느낀다. 이 대목을 배우 이은주가 접했더라면, 그녀도 구운 가자미의 고소한 향취를 머릿속에서 환기시키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이은주는 동갑인 나와 함께 계속해서 나이를 먹어갔을 것이라는 추측은 논리의 비약일까? 왜 김영하는 진작 이렇게 유쾌한 면모를 공개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주 약간은 김영하가 원망스럽다. 난, 이은주의 팬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