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밀러라는 중국계 미국인의 성폭력 피해 회고담. 성폭력 피해자가 얼마나 좌절하고,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서도 의도적으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고 그런 방식으로 자존을 유지한다.
작가의 의도된 유머 덕분에 책 읽기가 수월하다.
샤넬 밀러는 스탠퍼드대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에서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 눈을 뜬 곳은 병원 진료실. 만난 사람은 성폭력 대응팀 소속 경관이다. 이후 샤넬 밀러는 ‘에밀리 도’라는 가명으로 재판에 임한다.
성폭력 희생자들을 배려하는 미국 사회의 세심한 장치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느 시민단체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옷을 제공한다. 성폭력 사건 직후 병원으로 실려온 피해자가 입던 옷을 계속 입기를 꺼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검찰 수사 단계에서는 ‘전담 대변인’이 배당되기도 한다. (대변인의 역할이 자세히 그려지진 않았는데 법률적 조언을 제공하기도 하고 심리적 안정을 돕기도 한다. 샤넬 밀러 역시 대변인에게 상당히 고마워한다.)
하지만 미국 형사 사법 체계의 조악함, 허술함, 무심함이 더 크게 작동한다.
에밀리 도의 재판을 맡을 배심원 가운데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여성은 배제된다. 아마도 가해 남성에게 현저히 불리할 수 있다는 이유로 추정된다. 에밀리 도는 공감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12명의 배심원을 상대로 힘겨운 법정 싸움을 이어간다.
에밀리 도가 재판을 앞두고 고민하는 부분은 ‘피해자다움’이다. 피해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궁금해 한다. 담당 검사는 화를 내지 말라고 조언한다. 화를 내면 배심원을 설득할 수 없다. 하지만 무미건조해선 안 된다. 단조로운 어조는 무심해 보인다. 너무 명랑해도 안된다. 울면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감정에 치우치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만, 감정이 너무 없으면 성폭력으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가해 남성은 스탠퍼드대 학생이자 우수한 수영 선수라는 이유로 동정을 산다. 에밀리 도는 이 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피해자 의견 진술서를 통해 자신은 요리를 잘한다고 반박한다.
술에 취해 사건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에밀리 도의 끊긴 기억은 재판 내내 걸림돌이 된다. 에밀리 도는 여자가 술에 취해 쓰러졌다면 ‘옷을 벗기지 말고’ 일어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성적 동의 여부는 ‘온전한 문장’을 통해 발화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니오’의 의미라고 지적한다.
결국, 배심원 12명은 전원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판사는 징역 6개월을 선고한다. 하루를 모범적으로 복역하면 하루가 감형되기 때문에 실제 형량은 징역 3개월이다. 판사는 피해자의 고통이 명문대에 재학 중인 가해자의 잠재력보다 크지 않다고 봤다. 언론의 보도도 판사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재판 결과에 대해 배심원이 가해자에게 가혹했고, 술 때문에 촉발된 일을 흑백 논리로 재단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