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이야기: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 ]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지난 초여름. 그 순간, 그곳에서 애월의 푸른 바다가 선물한 느낌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사진을 아무리 잘 찍는다 해도, 글솜씨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날 바다와 하늘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100퍼센트 전달할 수는 없다. 갓 구운 빵이 나오는 시간에 운 좋게 빵집 근처를 지나게 되면 밀려오는 그 행복한 느낌은 또 어떤가? 운전대를 잡고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젊은 날 첫사랑의 추억이 담긴 노래가 우연히 흘러나오면 딱히 뭐라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올라와 가슴이 아련해진다. 이렇게 묘사하면 다른 이들도 대략 어떤 느낌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100% 전달할 수는 없다.
현대 철학과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당사자만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주관적이고 의식적인 그 무언가를 가리켜 '감각질(qualia, 퀄리아)'이라고 부른다. 퀄리아는 어디서부터 비롯될까? 이 질문은 '의식(consciousness)의 기원'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 뇌과학에서 아직까지도 가장 첨예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다. (몇 편이 될지 모르는 기억에 관한 주제가 마무리되면 아마도 다음 토픽은 '의식'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퀄리아는 기억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다. 퀄리아, 기억, 생각, 꿈, 의식, 이런 것들은 대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2015년 세상을 떠난 신경 과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는 베스트셀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에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경구를 인용했다. 세계적인 석학이며 철학자였던 버트란드 러셀이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천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자타공인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들의 모습은 단순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나 바로 눈 앞에 있기 때문에 알아챌 수 없는 것이다).
질문의 진정한 해답은 결코 불쑥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The aspects of things that are most important for us are hidden because of their simplicity and familiarity.
(One is unable to notice something because it is always before one’s eyes.)
The real foundations of his enquiry do not strike a man at all.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중 하나인 기억(퀄리아와 의식을 포함해)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약 1.5킬로그램에 불과한 우리의 뇌(brain)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아나가기 시작한 지 이제 백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니 말이다.
기억에 대한 현대 신경 과학의 설명은 두 가지 중요한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는 뉴런 주의(neuron doctrine), 다른 하나는 헵의 원리(Hebbian theory, 혹은 Hebb's rule)다. 스페인의 해부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ón y Cajal)은 현미경으로 뇌세포를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개의 독립된 뉴런(신경 세포)이 신경망을 이루고 신호를 주고받는 기본 단위(the principle that individual neurons are the elementary building blocks and signaling elements of the nervous system)"(Kandel. et al. 2013)라는 사실을 밝혀내서 1906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다.
코발트 빛 바다를 보며 감탄하고, 갓 내린 커피의 향에 기분이 좋아지고, 어릴 적 뛰어놀던 대나무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기억하고, 카톡을 하다 오해가 생겨 상처를 준 친구에게 미안해하고, 출근길 회의에 늦을까 불안해하고. 매 순간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생각, 감정, 의식,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뇌 속에 존재하는 860 억 개 뉴런의 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경이로움까지 느껴진다. 지금 느끼는 이 경이로움도 물론... 뉴런들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뉴런은 성능이 아주 좋은 현미경으로만 관찰 가능한 아주 미세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는 독립된 개체들이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 신경 세포들은 시냅스(Synapse)를 이룬다. 시냅스를 통해 신호를 주고받으며 뉴런들은 서로 연결된다. 만일 외부의 자극으로 하나의 뉴런이 작동을 시작(점화)했다고 치자. 이렇게 점화된 뉴런은 다음 뉴런에게 신호를 전달한다. 이렇게 동시에 점화된 뉴런들의 연결은 강화된다. "함께 점화된 뉴런의 연결은 강화된다(Cells that fire together wire together)", 이것이 두 번째 원칙인 헵의 원리(Hebbain rule)이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도날드 헵(Donald Hebb)은 1949년 발표한 자신의 저서 <The Organization of Behavior>를 통해 '학습의 신경학적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주장을 펼쳤다. 헵의 주장은 이후 학습과 기억에 관한 신경 과학의 수많은 연구들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 세 끼 어촌 편>에서 유해진이 바다에 던져 놓은 어망에 잡혀 저녁거리로 변신했던 녀석들 중에 군소가 있다. 대충 껍질이 없는 소라나 달팽이처럼 생겼다. 바다 달팽이라고도 부른다. 2000년에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신경과학자 에릭 캔들은 이 군소를 가지고 기억과 학습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습관화(habitualtion)와 민감화(sensitization)를 연구했다. 인간의 뇌는 무려 86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런데 이 해양 생물은 신경 세포가 약 10,000개에 불과하고 그중 일부는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크다고 한다. 그러니 신경 세포의 작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아주 안성맞춤
인 생물인 셈이다. 군소나 인간이나 신경 세포들이 작동하는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군소가 어떻게 자극을 기억하는지에 관한 연구는 그대로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캔들이 노벨상을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에릭 캔들은 기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기억은 심장이 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 과정(biological process)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뉴런 어쩌고 저쩌고 어려운 이야기에 놀라서 이제부터 등장할 재미있는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기억은 물론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 의식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뇌를 구성하는 신경 세포에 신호가 들어오고 서로 연결되는 데서 비롯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억이 생물학적 과정이며, 우리의 뇌, 그중에서도 특정 영역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지금부터 등장하는 사람들의 공로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경 과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다. 기억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 그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심리학자도 신경 과학자도 아닌데 말이다. 2005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니셜인 HM으로만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공개되었고, 그의 뇌는 연구를 위해 기증되어 미국 UC Davis 대학교의 연구실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헨리 몰레이슨(Henry Molaison, 이하 HM)은 16살이 되던 해부터 뇌전증(Epilepsy, 예전에는 간질이라고 불렀다) 발작으로 고통받았다.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발작이 심해지자, HM과 그의 가족들은 당시 유행하던 측두엽 절제술(temporal lobetomy)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말 그대로 뇌의 일부분(측두엽 부위)을 잘라내는 것이다.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를 괴롭히던 발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니까. 그런데 당시 이렇게 측두엽 절제술을 받은 사람들 중에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 양쪽의 측두엽을 모두 절제한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HM은 양쪽 측두엽 대부분을 절제했고, HM에게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뒤부터다.
IQ 검사 중에 숫자 따라 하기 검사(digit span)가 있다. 예를 들어 검사자가 "2, 3, 7, 8, 9"라고 말하면 검사를 받는 사람이 그 숫자들을 외웠다가 그대로 따라 하는 거다. 거꾸로 따라 하기도 있다. 검사자가 방금 전처럼 말해주면 피검자는 "9, 8, 7, 3, 2"라고 답하면 된다. 만일 한 번에 6개의 숫자까지를 그대로, 혹은 거꾸로 따라 할 수 있다면 검사 결과는 6점으로 채점된다. 단기 기억 중에서도 작업 기억 능력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유형의 검사다. HM도 이 검사를 자주 실시했다. 평균 정도의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자, 이제 검사를 마치고 휴식 시간을 가진다. 잠시 검사실을 떠난 검사자가 돌아왔다. HM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오전 내내 여러 가지 검사를 함께 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인사를 하고 서로 소개를 해야 한다. HM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자신이 조금 전에 그 이야기를 이미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측두엽에 있는 해마(hippocampus)와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이 사라진 HM은 단기 기억 능력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었다. 신경 과학에서 응고화(consolidation)이라 부르는 이 과정은 측두엽과 전두엽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안타깝게도 HM에게는 측두엽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각각 다른 인지 과정으로 처리되고, 뇌 안에서 각각을 담당하는 회로가 다르다는 것을 HM이 몸소 보여준 셈이다. 장기 기억 중에서도 그에게 특히 어려움을 준 것은 일화 기억이었다. HM은 수술 후에도 십자말 풀이(의미 기억)를 즐겨했다고 한다. 장기 기억 중에서도 의미 기억과 일화 기억 또한 각각 다른 생물학적인 기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 것 또한 HM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브렌다 밀너와 함께 평생을 HM과 함께 연구를 한 신경 과학자 수잰 코킨 (Suzaane Corkin)이 HM과의 이야기를 담은 책 제목은 < 영원한 현재, Permanent Present Tense>다.
"보통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그게, 어려운 질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거든요"
"어제 뭘 했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오늘 오전에는요?"
"그것도 기억 못 합니다"
"오늘 점심때 뭘 드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모릅니다. 나는..."
"내일 뭐 하실 생각이세요?"
"뭐든 유익한 걸 해야겠죠"
책 속에 등장하는 수잰과 HM의 대화다. 수십 년을 함께 하며 오랜 시간 많은 검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HM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올여름 휴가는 어디로 다녀왔는지, 어제 뭘 했는지, 아침에 뭘 먹었는지 자신의 삶 속에 벌어지는 사건들(episode)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HM에게 과거는 늘 하얀 백지일 뿐이다. 기억은 우리에게 미래를 향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매일 아침 차를 찾기 위해 지하 주차장 전체를 뒤져야 할 테고, 10년을 넘게 다녔어도 회사로 가는 길은 늘 초행길이 될 것이다. 아침마다 사람들을 만나 누군지 물어보고 소개를 해야 한다면,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보고서를 보며 이걸 왜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한다면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그러니 HM에게 주어진 시제는 '영원한 현재'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릭 캔들은 기억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하나로 붙들어 매주는 접착제(glue that holds mental life together)"라고 이야기한다.
아무 생각 없이 지상 주차장에 나왔다. "잠깐만, 차를 어디다 세웠지?" "찜질방에 간 게 어제야? 그제야?" "그저께 비가.." "비는 어제 왔어" 아 그럼 지하 1층인가 보다. 이제 막 50을 넘긴 부부의 대화가 이 모양이다. 세상 모든 만물이 유통기한이 있다. 우리의 뇌라고 다를까. 기억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우리의 지능은 18세 정도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수능을 고3 때 보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나 보다. 개인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신체 기능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두뇌도 25세가 지나면 서서히 그 능력이 감퇴하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45세부터 70세 사이의 공무원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연구(The Whitehall II Study라고 한다)에 의하면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45세가 지나면 기억과 사고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 부부를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자. 연구 결과에 따르면 45세에서 49세 사이에 약 3.6%의 사고 능력의 저하가 이루어지고, 65-70세에 이르면 남성의 경우 9.6%, 여성의 경우 7.4%가 떨어진다고 한다.
망각은 (기억의) 오류가 아니라 기본 기능이다! Forgetting is a "feature", not a "bug. 덴마크의 심리학자 사이먼 노르비(Simon Nørby)의 멋진 표현이다. 지지난주 월요일 내가 어떤 색깔 셔츠를 입었고 같은 날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 나왔던 반찬의 종류까지 모두 다 기억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나. 진화는 우리의 기억이 자주 반복되는 중요하지 않은 일(주차를 어디다 했지)이나 자질구레한 디테일보다 사건의 핵심적인 요소와 그 의미('gist' 라고도 한다)를 우선적으로 간직하는 방향을 택했다.
노르비는 망각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를 3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감정의 조절(emotion regulation)이다. 우리는 슬프고 부정적인 사건보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일을 더 오래 기억한다. 그 반대가 된다면 어떨까? 6년 전 신호 위반으로 접촉 사고를 낸 기억이,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에서 아쉽게 틀렸던 문제가 지금도 계속 떠오른다면 말이다. 둘째, 지식의 습득이다. 고등학교 시절 읽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세 번째 문장이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지를 기억하기보다 자연과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의지'를 기억하는 편이 낮지 않겠는가? 참고서 27 페이지 상단 박스 안에 나오는 내용이고 형광펜으로 두 번이나 밑줄을 쳐놓았다는 사실은 까먹어도 좋다. 그보다 그 단원의 제목이 기억이 나야 할 텐데 말이다. 셋째, 망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에 적응(context attunement)하도록 도와준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머릿속에 안고 있다면 대체 어떻게 현실의 문제들과 직면할 수 있겠는가. 덕분에 우리는 자주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간 일들에 발목 잡혀 꼼짝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허구한 날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는 TV 리모컨을 찾아 헤맨다고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뇌는 예전처럼 쌩쌩 돌아가지 않는 게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치매'라는 말은 좀 무섭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치매 환자의 유병률(prevalence rate)은 9.18%고, 치매 환자의 숫자는 54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같은 자료에 의하면 앞으로 2030년이 되면 유병률은 10%를 넘을 것이고 예상되는 환자의 숫자는 127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미국의 경우 가장 최근의 자료를 확인해보면 현재 알츠하이머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의 숫자는 무려 580만 명에 이르고, 75세가 넘으면 유병율이 17%를 넘어간다고 한다.
치매(dementia)는 기억력과 인지 기능, 사고 기능, 언어 능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의 감소로 인해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특정한 질병을 가리킨다기보다 관련된 증상들 전반을 지칭하는 표현에 가깝다. 치매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치매 환자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알츠하이머병(Alzheimer's disease, AD)이 그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치매 환자 중 약 70%가 알츠하이머병이 차지한다고 한다(http://public.crcd.or.kr/Info/Mechanism/Morbidity).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그다음을 차지하는 것이 혈관성 치매(vascular dementia)인데, 뇌졸중(중풍) 등으로 인해 뇌의 혈관에 산소 공급에 문제가 생겨 뇌의 일부에 손상을 입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치매는 루이소체(Lewy body) 질병, 전측두엽 치매(FrontoTemporal Dementia, FTD), 파킨슨병, 헌팅턴병 등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된다.
알츠하이머병은 1906년 최초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여자 환자의 사례를 발표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 알로이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알츠하이머의 주된 원인은 뉴런의 바깥쪽에 쌓이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beta-amyloid plaques)과 신경 세포 안 쪽에 축적되는 타우 단백질(tau tangles)로 인해 생기는 뇌의 변화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눈치채기 어렵게 서서히 찾아와 오랜 시간 천천히 그 증상이 악화된다는 점이다. 알츠하이머는 대표적인 퇴행성(degenerative) 질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알츠하이머는 천천히 한 영혼을 무너뜨린다.
치매는 그 원인이 되는 질병이 다양하듯 증상 또한 다양하다.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증상을 보이고 질병이 악화되는 속도도 다르기는 하나 알츠하이머병은 대부분 일정한 진행 단계를 따라 진행된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변화들은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기 무려 15 - 20년 전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70세에 치매 증상을 처음 보인다고 해도 뇌에서 일어나는 알츠하이머병의 시작은 50세부터 이미 시작되었을 수도 있단 말이다. 알츠하이머병이 처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경도인지장애(mild cognitive impairment)다. 사람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고, 먼 길을 찾아가다 길을 잃어 헤매거나, 소지품을 어디에 뒀는지 자꾸 잃어버리고 하면 이게 경도인지장애를 의심해볼 수 있다. 이쯤 되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누구나 응 설마 나도 싶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이가 들면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기억력이 감퇴되고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 아닌가. 신경 과학자 크랄(V. A. Kral)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기억력 감퇴를 '양성 노화 기억력 감퇴(benign senescent forgetfulnes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되긴 한다. 경도인지장애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치매로 진행될 확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게 알츠하이머의 전조 증상인지 나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혹시나 싶다면 조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미국의 알츠하이머병 협회(Alzheimer's Association, AA)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증상 10가지를 정리해 알려주고 있다. 괄호 안의 내용은 노화에 따른 일반적인 증상을 이야기한다. 즉 괄호 안의 내용 정도라면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출처 : https://www.alz.org/alzheimers-dementia/10_signs)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기억력 저하 (이름이나 약속을 까먹지만 그래도 나중에 기억이 난다)
계획을 수립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 (공과금 등을 낼 때 가끔 실수를 한다)
집을 찾아가거나 마트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시간과 장소가 헷갈린다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사물의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주 틀리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들어진다 (가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건 괜찮다)
자주 쓰던 물건을 찾지 못하고 물건을 엉뚱한데 둔다
판단력이 흐려진다
일이나 사회생활로부터 멀어지고 고립된다
성격이 바뀐다. 혼란스럽고 화를 내고 의심이 많아진다.
인지능력의 저하는 알츠하이머병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그래서 이제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어제 병원을 다녀왔는지, 지금 내가 왜 마트에 와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상태가 더 심해지면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생활조차 스스로 해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서적 동요도 함께 따라온다. 기분이 가라앉고 때론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평생을 함께 한 딸의 얼굴을 못 알아보고, 아내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군지, 나는 왜 여기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지와 같은 삶의 의미 전체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셈이다.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기억'의 힘이 아닐까?
"여기 아이스크림 종류가 뭐죠?"
"헤이즐넛, 딸기맛... 음 잠시만요. 까먹었네요. 잠깐만 확인하고 올게요"
"딸기와 화이트 초콜릿이요"
잠시 뒤 전혀 엉뚱한 메뉴가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자. 여기는 '실수를 하는 레스토랑(The Restaurant That Makes Mistakes)이니까. 영국의 알츠하이머병 협회와 채널 4 방송국이 함께 기획한 이 식당은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사회 적응에 관한 문제를 다뤄 큰 화제가 됐다. 알츠하이머병은 아직 치료약이 없다고 한다. 지난 30년 동안 200개가 넘는 약물이 임상실험을 거쳤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희망이 없냐고? 그렇진 않다. <Scientific American> 2017년도 4월호에 소개된 핀란드의 연구 결과를 잠깐 살펴보자. 'FINGER(Finnish Geriatric Inter vention Study to Prevent Cogni tive Impairment and Disability)'라 이름 붙여진 이 대규모 연구는 60세부터 77세에 이르는 1,260명의 실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했다. 이 중 631명은 치료군(treatment group), 629명은 통제군(control group)으로 나눴다. 그리고 치료군에게는 식단을 조절하고 신체 운동을 꾸준히 실시하고 인지능력을 키우는 훈련을 실시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치료를 받은 집단은 통제군에 비해 실행능력(executive function)에서는 83%, 처리 속도에서는 150%, 기억력 테스트에서는 40% 더 향상된 인지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치료군 안에서도 알츠하이머 위험 인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더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균형 잡힌 식단으로 잘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머리를 쓰는 활동을 지속하면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인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병의 발병을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셈이다. 아직까지 마땅한 치료약은 없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보건복지부 지정 노인성치매임상연구센터에서는 치매 예방을 위한 10 계명을 알려준다.
영국의 과학 잡지 <BBC Science Focus> 2019년 5월호에는 'Singing With Friends'라는 모임을 소개하고 있다. 치매를 가진 환자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만 해도 치매 환자에게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한다. 춤추고 노래하자. 가사와 멜로디를 외우고 박자를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 동안 우리 뇌 속 많은 부분들이 활발하게 움직인다. 치매에 가장 취약한 부분들이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기억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며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술을 한잔 하니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그래도 내일로 나아가지 않나. 과거를 기억하고 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기억'은 고통보다는 축복이 아닐까 싶다. 마룬 5가 노래한다. "Memories".
https://www.youtube.com/watch?v=SlPhMPnQ58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