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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휘 Sep 21. 2019

기억 I

[ 첫 번째 이야기: 기억을 구별하다 ]

"으악!"

벌써 세 번째다. 음식물을 담았던 그릇과 물컵을 함께 설거지를 하면 컵에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영 못마땅해서 컵과 텀블러는 꼭 뜨거운 물로 마무리를 한다. 집안의 모든 수전이 왼쪽으로 밀면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왼쪽 끝으로 돌려놓은 싱크대 수도를 누르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뜨거운 물을 쏟아내던 수도꼭지는 (멍청한!) 주인의 분부대로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내려보냈을 뿐이다. 문제는 제 때 작동하지 않은 나의 기억(왼쪽은 뜨거운 물이라고, 이 바보야!) 탓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다루는 수많은 분야 가운데서도 난 기억(memory)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다. 스마트폰의 작은 글자가, 지난주에 본 영화의 제목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여권이 대체 왜 서랍 안에 없는지, 이게 발이라도 달려서 어디로 숨은 건지 알 수 없을 때 흐릿해져 가는 '기억력'을 탓하게 된다. 혹은 다음 주 모임이 화요일인지 수요일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키를 깜빡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거리고는 핸드폰을 두고 온 자신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나이 탓만 할 수는 없다. 신발주머니와 도시락 가방(미안하다. 옛날 사람 맞다)은 왜 그리 자주 잃어버렸는지. 밤새 달달 외웠다고 자신했는데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장이 되어 버린다. 학창 시절 우리는 자주 이랬다. 자주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기억이 늘 문제만 일으키는 골칫거리는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과 그때 그 시절을 안주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를 들으며 지난 추억들을 소환하며 미소 지을 때, 대학생이 돼버린 딸내미의 어린이집 첫 소풍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을 때 기억은 과거로부터 보내진 뜻밖의 선물이 된다. 부장님은 보고서의 오타를 참지 못하고, 이사님은 대안이 없는지 반드시 물어볼 것이다. 지난 회의에 대한 기억들이 쌓여있지 않다면 다음 주 회의를 준비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억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잊으려 애써도 도저히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세상에 보낸 이들은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좀처럼 지우지 못해 슬픔에 잠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모든 곳, 어디를 가도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고, 파스타, 짜장면, 팥빙수 뭘 먹어도 그녀(그)의 흔적뿐이다. 은퇴 후 공원에서 소일을 하는 노인은 찬란했던 젊은 날을 추억하며 안타까워한다. 과거의 기억을 자꾸 불러내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다 보니 전국의 아재들과 꼰대들은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를 화두로 무용담을 늘어놓게 된다. 이 정도면 그래도 양반이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거나 재난 현장에서 살아 나온 이들이 종종 겪게 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의 증상은 시도 때도 없이 소환되는 공포스러운 기억의 흔적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때 발생한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이 놓은 덧에 걸려 현재라는 선물(present)을 놓쳐 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왜 무언가를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어떤 것들은 기억하려고 애써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떤 것들은 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 떠오르는가?"


만일 치매로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고 30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면, 사과나 배보다는 복숭아를 더 좋아하고 모임에 나갈 때는 꽃무늬 셔츠를 즐겨 입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면, 평생을 바쳐 한 분야에서 일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영화 메멘토(Memento)의 주인공처럼 5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는커녕 내가 왜 이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해온 직장 동료들과 매일 출근하자마자 통성명을 하고 처음 만난 것처럼 인사를 나눠야 한다면...


"기억을 잃어버린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면 내일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이런 것들이 나는 궁금하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심리학과 신경 과학 책을 들쳐보고 구글과 위키피디아를 괴롭히며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길이다. 이를테면 지적 여정을 담은 여행기인 셈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여행지 중 하나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다. 어디 가서 파리를 제대로 여행했다고 큰소리치려면, 에펠탑과 개선문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정도는 꼭 찍어줘야 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이집트와 그리스의 유물들, 모나리자를,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모네와 세잔의 그림 정도는 직접 눈에 담고 와야 한다. 화재로 사라져 버린 노트르담 성당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며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가 보지 않을 수 없고, 파리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베르사유 궁전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다면 파리 디즈니랜드도) 꼭 들러줘야 한다.

크렘 브륄레(crème brûlée),  커스터드 위에 얇은 캐러멜을 얹은 프랑스의 디저트

아침엔 갓 만들어진 바삭한 프렌치 바게트가 빠지면 섭섭하고, 샹젤리제 거리에서 달달한 크렘 브륄레를 함께하며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바토무슈(Bateaux Mouches, 센 강을 오가는 유람선)는 낮보다는 야경이 훨씬 아름답다. 파리를 하루 이틀에 둘러보겠다는 욕심은 버리는 편이 낫다. 파리처럼 '기억'도 한달음에 쓰윽 훑어보고 지나갈만한 여행지가 아니다. 우리는 보통 '기억'이라는 단어 하나로 특별히 그 의미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사실 '기억'은 결코 단일한 것이 아니다. 파리를 제대로 보고 즐기려면 여유를 가지고 구석구석을 돌아봐야 하는 것처럼 '기억'에 대해 좀 더 깊게 알아보려면 기억을 구분하고, 그 단면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기억은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기억(memory)과 학습(learning)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 '학습'이라면 그렇게 얻어진 학습의 결과가 '기억'이다.  이 간단명료한 정의는 저명한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가 집필한 인지신경심리학 교과서의 내용(Gazzaniga et al., 2019)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어제 수업 시간에 배운(학습) 것을 오늘 쪽지시험에서 제대로 적었다면 배운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추석 명절 때 갈비찜 레시피는 엄마가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학습) 아직까지 써먹고(기억) 있는 것이고, 언제 배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자전거 타는 법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개끈을 챙기면 곧 산책을 간다는 걸 지켜봐 온(학습) 우리 집 강아지들은 <개끈 챙기기=산책>이라는 공식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기억에 대한 연구에 그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운 실험실의 생쥐들은 미로 찾기를 반복(학습)하게 될수록 출구를 빠져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물론 기억의 힘이다.


인지 심리학에서 기억을 구분하는 방식은 크게 2가지다. 우선 기억이 유지되는 시간에 따라 단기 기억(short-term memory), 장기 기억(long-term memory)으로 나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내용을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지에 따라 서술 기억(declarative memory)비서술(non-declarative memory)로 구분한다. 서술 기억과 비서술 기억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서 각각 서술 기억은 외현 기억(explicit memory), 비서술 기억은 암묵 기억(implicit memory)으로 이름 붙이기도 한다.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식의 도식화는 사실 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감각 기억은 암묵 기억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서술/비서술을 나누는 기준과 외현/암묵 기억을 나누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표로 정리하는 게 보기엔 편하니까.


표 1) 기억의 분류


I. 단기 기억 (short-term Memory) : 감각 기억, 작업 기억

우리의 감각 기관은 끊임없이 정보를 얻는다. 운전을 하고 도심을 지난다면 방금 셀 수 없는 간판을 지나쳤을 것이다. 차에서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DJ가 쉬지 않고 말을 한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이 경우엔 시각과 청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 그야말로 스치듯 사라진다. 이렇게 아주 짧은 시간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왔다 백분의 몇 초 미만의 짧은 시간만에 사라지는 정보들을 우리는 감각 기억(sensory memory)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각 기억들이 아예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사라질 정보들이라면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뭐하러 애써 받아들이겠는가? 모든 기억의 시작은 감각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 정보들은 (주의를 기울이거나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비록 아주 짧은 시간 사라지겠지만, 이렇게 감각 기관을 통해 뇌로 들어온 정보들은 다른 모든 기억의 출발점이 된다. (감각 기억은 나중에 등장하는 '점화'나 '조건화'같은 암묵 기억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감각 기억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기억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하겠는가?


가장 대표적인 단기 기억의 형태가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이다. 점심시간, 어쩌다 보니 함께 간 8명의 주문을 대신하게 됐다. 짜장 보통 1, 곱빼기 1, 간짜장 2, 짬뽕 2, 볶음밥 1, 중국 냉면 1, 함께 먹을 탕수육 1. 여기 주문이요~. 점원이 오지 않는다. 가게 안이 북새통이다. 머릿속에 되뇌지 않고 있으면 바로 까먹을 것 같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정보를 잠시 머릿속에 붙들고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작업 기억이라고 부른다. 점원이 다가오는데 전화가 걸려 온다. 거래처 사장님이다. 견적서 건으로 3분 넘게 통화를 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겨우 겨우 붙들고 있던 복잡한 주문 내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다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정리를 해서 주문에 겨우 성공했다. 다음 날 물어본다면 어제 주문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까? 27 X 6을 암산으로 해보라. 칠육은 42고, 육이 12니까... 이걸 다시 더하고.. 이렇게 암산을 해야 할 때, 혹은 전화번호를 외워서 팩스를 보내야 할 때 우리는 작업 기억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작업기억의 용량은 무제한이 아니다.  우리가 한 번에 머릿속에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기억 용량의 한계, 그 매직 넘버는 7이다. '마법의 수 7 플러스 마이너스 2(The Magical Number 7, plus minus 2)'라고도 불리고 실험을 통해 이를 최초로 입증한 인지 심리학자 조지 밀러(George A. Miller)의 이름을 따서 '밀러의 법칙(Miller's law)'이라고도 한다. 즉, 다섯에서 아홉까지(그래서 7 더하기 빼기 2다) 개수의 정보(숫자나 알파벳, 사물의 이름 등)는 작업 기억이라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동안(머릿속으로 계속 암송하거나 이미지를 떠올리는 방식 등의 전략을 쓴다면 조금 더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붙들고 있을 수 있지만, 이 한계를 넘어가면 우리의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8자리 전화번호는 그런대로 외울 수 있지만 18자리 계좌 번호를 한 번에 외우고 입력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화번호가 (아직은) 8자리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작업 기억의 용량 한계를 극복하는 기억 전략 중 하나가 청킹(chuncking)이다. 여기 계좌번호다. 39745009366784002를 전화로 친구에게 알려줘야 한다. 한 번에 쉬지 않고 쭉 불러주면 바로 성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줄 때는 397-45009-366784-002 이렇게 나눠서(chuncking) 말해줘야 한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려면.



II. 장기 기억 (long-term Memory) : 서술 기억(외현 기억)

이렇게 아주 짧은 순간(감각 기억) 혹은 길어야 몇 분(작업 기억) 우리의 머릿속에 담아 둘 수 있는 것이 단기 기억이다. 반면 장기 기억은 말 그대로 오랫동안 유지되는 기억이다. 영국의 수도는 런던이고, 아이슬란드의 수도는 레이캬비크다. 영국의 수도가 런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학습) 언제부터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3년 전에도 알고 있었고 한 달 후에 물어본다고 해도 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치매가 오거나 기억상실증을 겪게 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이렇게 어떤 사실이나 정보를 오랜 기간 간직하고 있는 경우를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이라고 정의 내린다. 의미 기억은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는 물론 개인과 관련된 사실적인 정보들(가족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고향 등)도 포함한다. 아이슬란드의 수도가 레이캬비크라는 정보를 기억하는 것은 의미 기억이다. 그런데 아이슬란드 근처에도 못 가본 내가 수도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게 된 계기가 예능 프로그램 <강식당 3>에서 이수근, 은지원이 퀴즈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장면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는 다른 종류의 기억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억을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이라고 부른다.

사진출처 :  tvN


사과는 빨간색 과일이고, 가을에 주로 열린다. 영어로는 Apple, 빨간색도 있지만 노란색도 있다. 뉴튼의 눈 앞에서 떨어져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힌트를 준 것도 사과고, 윌리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활시위를 담긴 것도 사과다. 아, 내가 지금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만든 회사의 로고도 사과 모양이다. 이렇게 내가 사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은 의미 기억이다. 그런데 내게는 사과와 관련된 나만의 기억이 있다. 지난주 마트에 가서 사과를 샀다. 빛깔은 그런대로 잘 들었는데 아직 가을의 초입이라서 그런지 그리 달지도 않고 아삭 거리는 맛도 없었다. 작년 추석 선물로 받았던 사과 중에 유난히 크고 맛난 사과가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나만이 가지고 있는 사과에 대한 기억들이 일화 기억이다.


"우리는 왜 일화 기억을 가지게 되었을까?" "일화 기억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화 기억은 영어로 episodic memory다. '에피소드'를 기억한다는 이야기다. 토크 쇼에 나간 게스트들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기 위해 애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시즌 1은 8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시즌, '내러티브'라고도 한다) 속에서 하나의 사건(에피소드)을 다룬다는 의미다. 이 에피소드라는 말의 어원이 흥미롭다. Episode는 고대 그리스어 epi(~위에)와 hodos(길)이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즉 '길 위에서'라는 뜻이다. 일화 기억은 길 위에서 만들어진 기억인 셈이다.


200백만 년에 이르는 진화의 장고한 시간 속에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렵채집 생활을 하며 살았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것은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불과 1만 년이 채 안된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사냥을 하고 과일을 따서 먹고살던 수렵채집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일화 기억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냥꾼을 떠올려 보자. 며칠 전 뒷산 넘어 깊은 골짜기로 토끼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죽을뻔한 위기를 겨우 넘기고 살아남았는데,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 친구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호랑이가 나온 골짜기로 오늘도 내일도 사냥을 나간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 사냥꾼이 인류의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렇게 진화의 관점에서 일화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뒤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피소드)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예측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경험(에피소드, '며칠 전 뒷산 골짜기에서 호랑이를 만남')을 통해 미래의 행동('뒷산 골짜기는 당분간 절대 가면 안된다')을 예측하는 능력, 즉 일화 기억은 생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적 정보의 기억(의미 기억)과 개인적 경험의 기억(일화 기억)의 구별하여 그 개념을 명확하게 정립한 이는 심리학자 엔델 털빙(Endel Tulving)이다. 털빙은 일화 기억을 가리켜 "지적 시간 여행(mental time travel)"이라는 멋진 표현을 만들어냈다. 과거의 경험들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능력을 토대로 마음속으로 미래를 향해 미리 시간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다. 기억은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생긴 능력이다.


일화 기억은 '자서전 기억(autobiographic memory)'라고도 부르는데, 기억의 내용과 정보의 출처가 다름 아닌 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화 기억이 의미 기억과 다른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일화 기억의 경우 기억의 내용(사건, 무엇, what)뿐만 아니라 경험이 이루어진 시점(언제, when)과 경험을 하게 된 장소(where)를 모두 포함한 정보를 기억한다. 사냥꾼의 일화 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를 다시 재구성해 보자. ['며칠 전'(언제, when) 뒷산 골짜기(어디서, where)에서 '호랑이를 만났다'(내용, what)]는 전체가 하나의 일화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말이다. 의미 기억의 경우는 좀 다르다. 세종 대왕이 한글을 만들었고, 내 이름은 '김 용휘'라는 사실을 기억하지만 이런 의미 기억을 내가 언제 어디서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수전의 왼쪽에 빨간색 표시가 있고, 오른쪽에 파란색 표시가 있다면 왼쪽으로 돌리면 뜨거운 말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 기억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텀블러 설거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왼쪽으로 돌려 놓았 다는 사실을 난 기억(단기 기억)하고 있었는데,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까먹었다. 그래서, 화끈거리는 손에 얼음주머니를 가져다 데며 다시 떠올린다. 왼쪽으로 돌아가 있던 손잡이를 내려서 손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일화 기억이다. 의미 기억과 일화 기억은 기억의 내용을 말로 진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술 기억이다. 또한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측면에서 외현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장기 기억 (long-term Memory) : 비서술 기억(암묵 기억)

그렇다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말로 진술할 수 없는 기억",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도 존재한다는 말이 아닌가? 비서술 기억, 암묵 기억이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복잡해지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워진다.


걸어서 5분만 나가면 중랑천이 있고, 자전거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10년 전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불타는 의지로 제법 좋은 자전거를 샀다. 마지막 자전거를 탄 지가 언젠지 기억(일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잠시 비틀거리다 바로 어렵지 않게 달릴 수 있었다. 용케 자전거 타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순간인가부터 베란다에서 빨래 걸이 신세로 전락했지만, 지금이라도 자전거를 끌고 나간다면 바로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난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앞서 설명한 의미 기억, 일화 기억과는 다르다. 균형을 잡고 두 발을 교대로 앞으로 뻗으면 자전거가 나간다는 사실(의미 기억)을 알고 있다고 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전도 마찬가지다. 20년이 넘게 운전을 하고 있지만, 막상 운전하는 방법을 설명하라고 하면 좀 난감하다. 브레이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고민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아도 갑자기 방해물이 튀어나오면 발은 바로 오른쪽 페달을 밟게 된다. 이렇게 학습된 운동 기술은 대표적인 비서술 기억, 암묵 기억이다. 자전거 타기, 신발끈 묶기,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 등 한 번 익히고(학습) 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은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에 속한다. 


심리학자들은 괴상한 실험을 자주 만들어 낸다.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약한 바람이 나오는 장치를 눈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삐- 소리와 함께 바람이 나온다. 눈을 깜박거리게 된다. 이를 반복하게 되면 나중에는 굳이 바람을 불지 않아도 된다. 삐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눈을 깜빡거리게 된다. 심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비슷한 실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심리학자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의 유명한 실험이다. 실험의 주인공은 파블로프의 개. 종소리를 들려주면서 먹이를 주는 상황을 반복하게 되면 나중에는 먹이를 주지 않고 종소리만 들어도 실험실의 개는 침을 흘리게 된다. 조건화(conditioning)라는 과정을 통해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자극(종소리나 삐 부저음)과 자극(먹이, 바람)을 연결하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무의식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조건을 연결하는 학습을 하게 되고, 학습의 결과를 기억하게 된다. 사람에게 침이 흘러나오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닌지라 고안해 낸 것이 '눈에 바람 불기' 실험이다.


좀 더 고상한 실험도 있다. 키보드에 숫자가 있고 컴퓨터 화면에 뜨는 숫자를 입력해야 한다. 숫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빨리 입력해야 한다. 주의력과 집중이 필요한 실험이다. 그런데 이걸 대체 왜 하나 싶은 실험에 심리학자들은 몰래 장치를 해놨다. 랜덤하게 나타나는 숫자들 사이에 몰래 패턴을 숨겨 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9237564238937564095,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눈치챘을까? 37564가 중간에 두 번 반복된다. 실험자들은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실험은 끝난다. 하지만 실험 결과 패턴이 등장하면 사람들의 입력 속도는 빨라진다. 즉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면 산책을 나온 작은 푸들의 모습만 보여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질 것이다. 상한 굴을 먹고 장염에 걸려 구토를 하며 고생을 한 적이 있다면 싱싱한 굴을 봐도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날지도 모른다. 이렇게 자극에 대한 반응의 학습이라는 관점에서 조건화는 인류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 조건화는 뒤에 등장할 '군소'와 같은 무척추동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서도 비슷한 원리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가장 원초적인 의미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수박, 사과, 감, 배. 여기서 마지막 배는 뭘 가리킬까라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과일의 한 종류를 떠올릴 것이다. 자동차, 비행기, 배? 바다 위에 떠가는 교통수단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머리, 어깨, 가슴, 배? 이 '배'는 고개를 숙이면 보인다. 같은 글자 '배'를 제시했지만 우리는 모두 앞서 제시한 단어들에 따라 각각 다른 내용을 기억해 낸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점화(priming)'라는 심리학 용어를 통해 설명한다. 앞 서 제시된 자극이 뒤에 제시된 자극, 기억의 인출을 유도하거나 그 내용을 변화시키는 현상이다. 마트에 갔는데 공유의 얼굴이 인쇄된 광고판을 보게 된다. 어느새 '카누' 한 박스를 카트에 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공유가 모델로 등장하는 TV 광고를 7년 넘게 보다 보니, 마트 매대 앞에서 공유의 모습이 담긴 광고판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도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점화(!)당하고 만 것이다. 사실, 점화 효과야말로 광고가 작동하는 결정적인 심리적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노란색을 보면 맥도널드가 떠오르고, 빨간색 캔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마르다.       


학습화된 기술, 절차 기억, 조건화, 점화 등은 비서술 기억, 암묵 기억이다. 언어로 진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서술 기억이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해도 작동한다는 측면에서 암묵 기억이다. 




기억의 여정, 그 첫 번째 경유지는 기억을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쓰는 과학자들에게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할 때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모른다.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라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사라지면, 그때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기억을 포함해 우리 삶에 소중한 것들이 대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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