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이 벽이 되어 가는 세상
2019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 <조커>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 두 편의 영화 속에 계단이 있다. 계단이야 어디를 가든 흔하게 만날 수 있으니 뭔 대수야 싶지만 두 영화 속 계단의 의미는 남다르다. 폭우 속을 뚫고 기택의 가족이 끊임없이 내려가야 했던 계단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시각적 장치다. 박사장 네 집은 온통 계단이다. 봉준호 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를 '계단 시네마'라고 칭했다. <조커>의 계단은 또 어떤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던 외톨이 아서 플렉은 계단을 내려오며 조커로 새롭게 태어난다.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 그 이전 영화의 주인공은 아서 플렉이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고 나면 영화의 주인공은 '조커'로 바뀐다.
언덕 위가 부촌인 곳이 있다. 로스엔젤리스의 비벌리 힐스(Beverly Hills)엔 할리우드 스타들이 주로 모여 살고 서울의 평창동, 한남동엔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이 모여 산다. 빌리 조엘의 노래 <Uptown Girl>은 아랫동네(downtown)에 사는 가난한 청년이 윗동네(uptown)에 사는 부유한 여성에게 사랑을 구하는 노래다. 영화 <기생충> 속 박사장의 집도 언덕 위에 있다. 그런데, 도시의 빈민촌도 대개 언덕 위에 존재한다. 달이 가까워서, 달이 잘 보여서 '달동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면 좀 낭만적이다 싶기도 하지만 달동네에 산다는 건 아침저녁으로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열악한 주거환경을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서가 힘겹게 오르던 그 계단은 뉴욕의 브롱스(Bronx)에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빈민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할렘(Harlem)'이 있는 곳이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 아서는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가야 한다.
거리의 아이들에게 이유 없는 폭행을 당했다. 사회복지사는 아서의 호소를 도무지 들어주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앞자리에게 앉은 아이에게 선의의 장난을 치지만, 감정실금(PBA)*이라는 신경 장애 덕분에 사람들의 오해만 살 뿐이었다. 길고도 험난했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영화는 꽤 긴 시간 그를 따라간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홈리스의 모습이 보이고 거리엔 치우지 않은 쓰레기봉투가 가득 쌓여있다. 힘겹게 발자국을 옮기는 아서에게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이 그를 막아선다. 삶의 굴레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터벅터벅 오를 수밖에 없는.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삶이라는 계단과 마주하지 않나. 돌아갈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허벅지가 끊어질 듯 아프고, 숨이 턱턱 차올라도 한 계단 한 계단 이를 악물고 올라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계단.
자신을 밀고한 직장 동료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피에로 분장을 한 아서는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온다. 허공을 향해 차오르는 그의 발길질은 자신감에 차 있다.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소심한 은둔형 외톨이(incel) 아서 플렉이 고담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조커'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그 변신의 무대는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안고 터덕터덕 오르던 바로 그 계단이다. 자신의 앞 길을 막아서던 그 계단이 이제 세상을 향한 분노와 편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주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 계단을 다 내려오는 순간, 이제 '아서 플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조커'만이 있을 뿐이다.
박사장 네 집 계단은 공간의 분리를 위한 건축 구조물이다. 차고와 지하 창고, 거실과 주방, 침실은 모두 계단으로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공간은 사생활(privacy)을 보호하며 개인의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나눈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렇게 분리된 공간 뒤에서는 비밀이 자란다. 가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계단 너머로 몸을 숨기면 자신의 시선을 숨긴 채 타인을 몰래 지켜볼 수도 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엿들을 수 있다. 때론 계단을 오르다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진짜 비밀은 계단 아래 숨겨진 공간 속에 있었다.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계단, 그 아래 다시 숨겨진 계단을 내려가면 영화가 애써 감춰 놓은 비밀의 공간이 등장한다.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진실의 또 다른 단면은 너무 잔인하다. 기택의 가족과 박사장의 가족을 통해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보고 있다고 믿고 있던 관객들에게 반지하 아래의 세상을 드러낸 것이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숲 속에 적외선 카메라를 비추어 놀란 사슴을 모습을 포착하듯이 말이다.
영화적 상상력일 뿐이라고? GDP 기준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겨우 들여다볼 수 있는 비밀의 공간 속에 숨겨진 진실은 균열된 틈을 타고 드물지 않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송파 세 모녀 사건. 종로 고시원 화재 사건. 인간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되지 않는 조건을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극빈층에 속하면서도 정부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비수급 빈곤층이 무려 9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지금 바로 여기 대한민국의 이야기다.
완벽해 보였던 모든 계획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억수같이 폭우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박사장 네 가족에게 그날 밤 폭우는 모처럼의 가족 캠핑을 망친 재수 없는 일일 뿐이었지만, 그 비는 기택네 가족의 모든 계획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간신히 박사장 네 집을 빠져나온 기택과 기우, 기정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그리고 그 계단을 따라 같이 흘러내려오는 것은 빗물과 온갖 쓰레기들. 구정물이 허리까지 차오른 기택의 반지하 방은 '낙수 효과'라는 거짓 이데올로기를 보기 좋게 전복시켜 버린다.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 파이가 커질수록 모두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진다는 경제학자들의 감언이설은 오랜 시간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의 단골 레퍼토리 노릇을 했다. 지금 내 몫이 줄어도 그렇게 해서 회사가 성장하고 나라가 부유해지면 내게 돌아올 파이의 몫이 커질 줄 알았다. 그렇게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맸고 IMF 사태도 이겨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세계 전체를 들여다 보나 우리나라만을 놓고 보나 경제 양극화는 오히려 점점 심해져만 가고 있다. 파이의 크기가 점점 커져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최상위 0.1%를 제외한 나머지에게 돌아가는 몫은 도무지 늘지 않는다. 빵 부스러기조차 손에 묻히기 힘든 절대 빈곤층의 숫자마저 점점 늘어만 간다. 빗물이 아래로 흐르듯 경제 성장의 단물은 계단을 타고 저절로 아래로 흘러내릴 거라 믿었다. 우리 모두가 너무 순진했나 보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건 구정물뿐이다.
아서는 계단을 내려가며 조커로 변신한다. 박사장 네 집에서 기택의 집으로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땅 아래로 반 층을 더 내려가야 기택이 사는 집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오며 조커로 변신한 아서는 이제 그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기택도 마찬가지다. 빗물을 타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또 아래로 향하는 온갖 쓰레기 더미와 함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기택네 가족은 이제 다시 올라갈 수 없다. 이재민들이 모인 체육관에 누워 아들 기우가 아버지에게 '계획'을 묻는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No plan.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기택은 안다. 대왕 카스텔라 집이든 뭐든 간에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노력한다고 해도 저 계단이 호락호락 오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박사장 네 지하 창고 아래 숨겨진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비밀의 공간에 갇힌 기택은 영원히 갇혀 버린다.
벽은 수평의 공간을 나눈다. 계단은 수직의 공간 사이에 존재하지만, 그 원래 목적은 통행을 막기 위함이 아니다. 본디 계단은 오르내리기 편하라고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계단이 벽이 돼가고 있다. 계단이 점점 높아지고 가팔라질수록, 턱 하나하나가 발자국을 옮기기 힘들어질수록 계단은 벽이 되어 간다. 조커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한 악당이 되어서야만 자신 있게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계획'을 세워도 결코 오를 수 없는 계단이라면. 계단과 벽이 대체 뭐가 다른가?
아니 차라리 벽이 날지도 모른다. 벽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니 말이다. 베를린의 장벽처럼,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처럼, 혹은 트럼프가 엄청난 돈을 들여 멕시코 국경에 세운 장벽처럼 눈에 보인다면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싸움을 벌여야 했는가? 역사는 이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통곡의 벽도 트럼프의 장벽도 언젠간 무너질 것이다.
"노력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어", "네가 아래에 있는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야, 너의 잘못이지. 어서 올라 와." 계단을 통해 분리된 공간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지금 한 발자국을 뗀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마치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계단을 오르며 나만 힘든 건 아닐 거야, 너무 힘들지만 조금만 더 참고 오르면 어딘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Kicking away the ladder. 캠브리지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 선생의 2003년 책 제목이다. 식민지 지배를 통해 우위를 차지한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발전 기회를 빼앗아버리려는 시도를 '사다리 걷어차기'로 표현했다. 먼저 정상에 도달한 사람이 자신이 밟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버린다는 말이다. 선진국에 내세우는 논리는 "자유 무역(free trade)"이다. 자신들은 국가가 주도한 식민지 지배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룩해놓고 뒤따라오는 자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강요하는 것이다.
마치 사다리를 걷어차듯 이미 계단 맨 위 꼭대기에 오른 이들은 점점 높아지는 계단의 덕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단이 점점 벌어져 더 이상 아래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계단의 정상에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면 계단은 그들에게 보호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계단이 극과 극으로 사람들을 나눈다면, 그리고 계단을 통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게 된다면, 계단이 벽으로 굳어간다면 현실은 점점 더 <기생충>과 <조커>를 닮아갈 것이다. 지하실 비밀의 공간에 숨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포기하거나, 피에로 분장을 하고 거리로 나와 분노와 좌절을 폭력과 시위로 분출하거나. 2019년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계단은 그렇게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 감정실금(PBA)에 대해서는 아래의 브런치 글 참조
https://brunch.co.kr/@kissfmdj/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