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사랑하라고? 아니 Wake up!
궁금한 걸 잘 못 참는 성격이라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미드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아니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섣불리 엄두를 내지 않는 편이라고 해야겠다. 재미있다고 소문이 난 드라마일수록 난무하는 떡밥과 고구마밭 넝쿨을 피해 갈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한참 빠져들어 흥미진진해진다 싶으면 난데없이 한 시즌이 끝나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다음 시즌까지 목을 빼고 기다리다 지쳐버리고, 6개월이나 1년 후쯤 막상 다음 시즌이 시작되면 전편이 어디서 끝났는지 기억이 또 가물가물하다.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를 보기 시작했다. 이건 뭐 끝난 것도, 끝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찝찝함을 남긴 채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 시즌 3가 끝나버렸다. 아쉽다. 뭐 볼 게 없나 고민하다 이걸 골랐다. 워낙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 들었고, 시즌 5개를 끝으로 이미 오래전에 종영된 드라마가 아닌가. 다음 시즌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로튼 토마토(미국의 영화/드라마 리뷰 사이트) 점수가 압도적이다. 잘난 체하며 꼬투리 잡는 걸 즐기는 평론가들(100점 만점에 96점)이나 일반 관객들(98점) 모두 인정한 셈이다. 하루 건너 하루, 한 번에 두어 편의 에피소드를 보다 보니 2주 만에 벌써 시즌 2가 반 이상 지나갔다.
주인공 월터. 50살, 가장이다.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17살 아들과 월터의 나이 50에 원치 않는 늦둥이를 임신한 아내. 자신의 표현대로 고등학교 화학 선생님을 하며 지내기엔 과분("over-qualified high school teacher")할 만큼 자신의 분야(화학)에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설립한 회사의 주식을 5,000 달러에 넘겨버리고 갑자기 그만두는데, 월터가 회사를 떠난 후 그 회사는 대박이 나고 친구는 부자가 된다. 고등학교 선생님 월터는 박봉에 시달리며 장애가 있는 아들과 곧 새로 태어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걱정이 태산인데 말이다. 아, 주택 담보 상환 대출도 만만치 않다. 뭐 사실 먹고사는 일이 쉽고 만만한 적이 어디 있었을까 싶지만, 그래도 힘겹게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있던 월터에게 운명은 정점을 찍는다. 폐암 말기.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월터는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 본다. 곧 태어날 딸과 아들을 대학교까지 졸업시키려면 들어갈 학비가 얼마나 될까? 주택 대출 상환에 생활비, 거기다가 미국처럼 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나라에서 병원 치료비까지.. 답이 안 나온다. 교사 생활을 하며 적립해둔 연금으로는 택도 없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월터는 "막 나가기(breaking bad)"로 맘을 먹는다. 숨 막히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가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지 않았을까? 일탈. 한 번쯤 되는대로 그냥 막살아보는 거 말이다. 암튼 범죄와는 인연이 멀었던 평범한 가장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마약 제조에 뛰어든다. 월터는 그 누구보다 화학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화학자로서 넘치는 재능을 활용해 월터는 최상급의 마약, 암페타민(amphetamine, 투명한 외형 때문에 흔히 '크리스탈'이라고 불린다)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여기서부터 모든 게 꼬이기 시작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소심하기 그지없었던 화학 선생님이 무시무시한 멕시코 갱단과 마약 밀매 조직을 맞닥뜨리게 되고, DEA(미국 연방 마약 전담 수사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하필 매부(妹夫)가 DEA 요원이니 더 아슬아슬하다. 처음 출발은 뭔가 그럴듯해 보였지만 마약 제조상으로서 월터의 새로운 인생은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고 꼬일 대로 꼬여만 간다. (잠시 암페타민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오자...)
뇌(brain)를 이루는 신경 세포(뉴런)들은 시냅스(뉴런 사이들 간에 간극으로 신경망을 이루는 기초가 된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다. 뉴런들 간에 신호를 주고받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 화학적 물질의 작동에 기반을 두고 벌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신경 세포들 간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경 전달 물질(neurotransmitter)이다. 100여 종이 넘는 신경 전달 물질 중에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도파민(dopamine)이다. 도파민은 흑질(Substantia Nigra)과 중뇌의 배측 피개부(Ventral Tegmental Area: VTA) 등에서 주로 분비되고 전두엽을 비롯한 뇌의 다양한 영역으로 이동(아래 그림 참조)한다. 도파민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신체를 떨거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지는 등 운동 장애를 일으키는 파킨슨 병은 도파민 결핍으로 일어나는데, 도파민은 우리 신체의 운동 조절 능력(motor control)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도파민은 우리 두뇌의 보상 중추(reward system)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하고, 게임에 빠져 드는 등, 우리의 행동을 유발하고 그런 행동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도파민이다. 사실 생존에 있어 도파민과 관련된 보상 중추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도파민 분비가 원활하지 못한 경우 주의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한 경우 우울증이나 조현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월터가 제조("cook")하는 크리스탈(암페타민)은 바로 이 도파민에 작용하는 화학 물질이다. 암페타민은 도파민의 재흡수를 억제하고 도파민 분비를 촉진해서 극단적인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실 합법화된 마약이라 할 수 있는 커피, 술, 담배를 포함해 대부분의 마약류의 약물이 신경 전달 물질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효과를 가져온다. 점심 먹은 지 네댓 시간이 지나 출출할 무렵의 초코 바 한 입, 혹은 야근으로 머리가 띵하고 기운이 빠질 때 달달한 카페 모카 한 모금이 우리 뇌 속에서 만들어내는 행복감은 암페타민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 강도에 엄청난 차이가 있고... 마약류는 불법이다! 강렬한 자극은 중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사실.
이야기가 뇌과학으로 새 버렸다. 아무튼 50살 월터의 인생은 참 기구하기 짝이 없다. 기구한 운명을 논하자면 <브레이킹 배드> 말고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또 다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이'도 빠질 수 없다.. 공효진이 정말 너무나 멋진 인생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동백이. 7살에 홀어머니에 의해 버려져 고아가 된다. 첫사랑의 주인공은 아들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8살 필구는 너무 일찍 세상에 눈떠 애어른이 돼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 엄마에게 이런다. "내가 왜 엄마를 지켜야 해, 엄마가 나를 지켜야지, 나 빼고 세상 사람들 다 엄마를 싫어하니까." 게장집만 즐비한 어촌 마을에서 술집 <카멜리아>를 하며 온갖 손가락질과 험담을 견디며 살아간다. 연쇄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범인은 아직도 동백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자신을 버린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는데 치매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박복함'의 사전적 정의에 가깝다.
월터와 동백이. 팔자라 부르든 운명이라 부르든 둘의 인생에 주어지는 삶의 조건들은 참으로 기구하다. 폐암에 걸리고 말고는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7살에 버려져 고아가 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 또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운명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서 지난 시간 자신이 내린 선택과 결정 또한 운명의 모습으로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바꿔 놓을 수 있다. 월터가 자신이 설립한 회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화학 선생님이 아니라 잘 나가는 화학 기업의 CEO를 하고 있다면? 지금의 아내가 아니라 옛 애인 그레첸과 결혼했더라면? 동백이가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혹은 아무 연고도 없는 '옹산'이라는 시골 마을에 와서 술집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버린, 그리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크고 작은 수많은 결정들이 우리 삶의 얼개를 짠다. 때론 기억조차 못하는 작은 선택들조차 '운명'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자신이 타고 있는 '삶'이라는 배가 어느 곳으로 향할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삶에 주어진 조건들의 집합을 '운명(Destiny)'이라고 정의 내려 보자. 그리고 운명이라는 바다를 헤쳐나가기 위한 모든 노력과 고민과 선택의 결정체를 '의지(Will)'라고 해두자. 여기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조건, 즉 '운명'의 모습이 있다.
[ destiny #. 01 ] 태어나 보니 엄마는 대기업 임원, 아빠는 국회의원이네? 돌잡이로 장난감 대신 빌딩을 잡았는지 유치원에 들어가고 보니 내가 건물주네? 공부 관심도 없고 잘 못해도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대학은 외국에 많아. 유학 가면 되지 뭐. LA 클럽 가면 나 같은 애들이 얼마나 많다고? 20살 생일 선물인데 엄마 아빠가 2억짜리 마세라티 정도는 보통 사주는 거 아니야? 생일 파티는 클럽에서 만수르 세트(가수 승리의 클럽 버닝썬에서 팔았다는 1억짜리 술 세트다) 정도는 시켜놓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destiny #. 02 ] 태어나 보니 아빠는 장애인,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시네? 공부는 하고 싶은데 남들 다 다니는 학원 갈 형편도 안된다. 그래도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대학에 들어오긴 했는데 학자금 융자 덕에 빚만 늘어가네? 20만 원짜리 반지하 월세 방에서 자취하며 편의점, 음식 배달, 안 해 본 아르바이트 없이 죽어라 노력해도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네? 남들 다가는 어학연수도 못 가고 이런 스펙으로 어디 취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한 거지?
두 명의 20살 청년. 마세라티와 배달 알바 오토바이. 노력과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알란 쿠르디(Alan Kurdi)라는 아이에게 주어진 운명의 모습은 차마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두렵다. 독재와 종교 갈등으로 8년이 넘게 진행된 내전이 벌어진 시리아에서 태어나다니, 태어날 아이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과연 누가 그런 선택을 하겠는가? 쿠르디의 부모는 고향을 떠나 고무보트에 가족에 운명을 의지한 채 목숨을 건 탈출을 하기로 '선택'한 거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잔인하디 잔인한 운명이 허락한 3년의 짧은 시간의 마지막 순간이 (하필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중해 해변에서 비극적으로 끝날 거라고 쿠르디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뭐라고? 운명을 사랑하라고? 철학자 니체의 명령이다. 니체 사후에 발간된 책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의 한 구절이다. 라틴어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는 로마의 집정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흥분한 군중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채찍질당하고 조롱당하며 피를 흘리고 있던 예수를 가리키며 한 말이다. "예수도 그저 한낱 사람일 뿐이다". 신, 특히 기독교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가 아닌가. 아모르 파티가 등장하는 문맥 전체를 좀 살펴봐야겠다. (인용문은 노르웨이의 철학자 군나르 시르베크와 닐스 길리에가 지은 <서양철학사>(윤형식 옮김, 이학사)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나의 문구는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즉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리고 또 영원히 [주어진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을 단지 견디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숨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이다 -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의 맥락은 대략 이런 것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고 견디면 젓과 꿀이 흐르는 천국(내세)이 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대체 왜 현실을 천국과 같이 만들지 않는 것이지는 모르겠다. 인류의 모든 비극도 신의 뜻이라고? 잘 모르겠다. 플라톤 이래 철학은 현상과 이상을 분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참하고 불 품 없는 현상 저편에 아름답고 순수한 무언가(이데아)가 존재한다는 헛된 믿음을 심어줬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젊음'도, '아픔'도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형이상학적 명제가 아니다.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젊은 이들에게 '아픈 청춘'은 그저 현실일 뿐. 니체에게 운명은 신과 같은 절대자나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놓은 정해진 질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러니, 니체는 우리에게 종교와 형이상학이 약속하는 미래의 행복과 환상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Matrix)>가 20주년을 맞아 새롭게 개봉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와쇼스키 형제(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형제가 맞았다. 하지만 둘 다 성전환 수술을 해서 지금은 자매라고 부른다)는 정말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은 뇌신경 세포의 연결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이 매트릭스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면? 인간은 기계를 위한 일종의 전원 공급 장치, 즉 배터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면? 영화가 제시한 세계관과 놀라운 상상력은 수많은 영화광들은 물론이고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을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필자의 홍대 영상 대학원 졸업 논문도 이 영화를 모티브로 쓴 것이다)
선지자 모피우스가 주인공 네오(Neo)에게 두 개의 알약을 제시한다.
선택의 순간이다.
파란 알약을 선택하면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가혹하다.
자유를 얻게 될 것이나 그 자유는 절망적이다.
빨간 알약을 선택하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행복하게 살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물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른 체 말이다.
모르는 게 약("Ignorance is bliss")이 아닌가?
매트릭스는 물론 파란 알약을 선택한다. 운명을 믿느냐는 모피우스의 질문에 네오는 No라고 답한다. 왜?
"내 삶을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Because I don't like the idea that I'm not in control of my life)".
그렇게 주어진 운명과, 기계와, 시스템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주인공 네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중력(운명)을 거슬러 하늘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락 그룹 <Rage Against The Machine>의 "Wake Up"이다. 거친 기타 리프에 실어 혁명과 투쟁을 외치는 노래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폭주하는 자본주의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버리고 전세계적인 수준에서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가고 있다. 헛된 믿음과 종교, 이데올로기는 사람들 간에 편을 나누고 아직도 지구 여기저기를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다. 발전과 성장의 논리 앞에 하나뿐인 지구의 환경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걸 모두 운명이라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받아들이라고 하면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바꿀 수 있는 게 없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주장이 그래서 난 좀 아쉽다. 그보다는 파란 알약을 선택하고 환상에서 깨어나 싸우기를 선택한 네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깨어나라. 현실을 직시하라. 시스템과 맞서 싸워라.